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우옌반쪼이 (문단 편집) == 상세 == 1940년 2월 1일 꽝남(Quang Nam)성 디엔 반(Điện Ban)현에서 태어났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지만, [[제네바 협약]]에 따라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베트남이 분단된 이후 수많은 북베트남 사람들이 [[월남]]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50년대 북베트남에서 실행했던 토지개혁의 혼란을 피해 월남했던 가톨릭 교도가 60만명 정도 되고, 불교도와 민중들을 합친다면 80만명 선이다. 이들은 응오딘지엠의 핵심 지지계층이 된다. 반대로 지엠 정권 아래 점차 조여오던 전직 베트민 참전 용사들에 대한 박해, 백색 테러 때문에 월북한 남베트남인들도 10~15만 가량이 있었는데, 이들 또한 60년대 들어 반사이공, 반미 무장 투쟁이 본격화 되면서 대거 재월남하여 베트콩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때 응우옌반쪼이도 부모를 따라 [[사이공]]으로 이주했고, 그는 전구제조 공장에서 전기공으로 근무했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부정부패와 가족정치 그리고 불교도 탄압으로 인하여 민심을 제대로 못잡았고, 1960년 남베트남에서는 자생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창설되어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싸우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월남한 응우옌반쪼이는 전구제조 공장에서 전기공으로 근무하다가 [[베트콩|무장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1964년 초 남부 롱안(Long An)성 게릴라 기지에서 정치 학습과 게릴라 전술을 배웠다. 결혼한 지 1주일도 안 된 응우옌반쪼이는 1964년 5월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방부장관이 베트남을 방문하자 [[떤선녓 국제공항]]에서 사이공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꽁리(Cong Ly)' 다리에 폭발물을 설치했다가 그만 들켜버려 체포되었다. 남베트남 경찰에게 체포된 응우옌반쪼이는 체포된 후 6개월이라는 기간동안 남베트남 경찰의 온갖 잔인한 고문과 구타 그리고 회유를 받았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다. 군사재판에서 그는 공개 [[총살형]]을 선고 받았고, 1964년 10월 15일 결국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총살형이 집행되기 이전 응우옌반쪼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저널리스트로서 당연히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비행기와 폭탄으로 우리나라의 인민을 대량으로 살육하고 있는 것은 '''미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국을 정복하는데 필요한 모든 계획을 세웠던 자는''' 바로 저 '''[[로버트 맥나마라]]'''입니다. 내가 반대했던 것은 바로 미국입니다. 이 땅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범한''' 맥나마라를 나는 처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 >"내 마지막 소원이 있다. 내 조국의 하늘을 보고 싶다. 눈가리개를 벗겨 달라...." >"내 이 말을 꼭 기억해 달라. >'''타도 미제국주의!''' >'''베트남 만세!''' >'''[[호찌민]] 만세!'''" >---- >출처: 왜 호찌민인가? p33~3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