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병 (문단 편집) == 정체성 == > 가만히 생각건대,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 예기의 큰 의리이고, 9대의 원수도 반드시 갚으려 하는 것이 춘추의 아름다운 말이다. '''임금을 위하여 원수를 제거해야 하니, 신민(臣民)으로서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 ------- > -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박춘무의 격문, 花遷堂集 卷1, 「檄文」 > 지금 이 잔악한 왜적의 소행은 짐승보다 더 심한 것이 있다. 백성들을 살육함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연물을 모질게 해침에 가옥과 식량을 모두 불살랐다. 길에서 아낙네 한 명을 만나면 사내 열 명이 다투어 淫行을 하니, 이는 바로 하늘 아래 수많은 오랑캐들도 하지 않고 지각이 없는 짐승도 오히려 하지 않는 짓이다.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비록 감히 막는 자가 없지만 천지 산천의 귀신이 모두 은밀히 주벌할 것을 의논하고 중국과 오랑캐들이 모두 드러내 처형할 것을 생각하니 '''비록 죽음을 앞두고 잠시 목숨이 붙어 있는 사이에 우리 백성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天定人勝의 날에 그 죄를 자복할 것이다.''' > ------ > -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의 격문, 「告諭本國人爲倭所擄君文」 > 나 고경명은 진실된 마음의 노인이며 백발 부유(腐儒)로서, 한밤중에 닭소리를 듣고 많은 고난을 견딜 수 없어 중류의 노를 쳐서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는 한갓 견마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품었을 뿐이요,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는 미약한 힘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향할 것이니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군중에게 맹세하는 도다.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천둥 울리듯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고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뛰어넘을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비처럼 모이니 이는 절대로 강박해서 응하거나 억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신하로서의 충성된 마음이 함께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위급존망의 날에 처하여 감히 하찮은 몸을 아끼겠는가.''' 처음부터 의병이라 칭한 이상 직분에도 매이지 않았으며, 병졸은 곧은 것으로서 장렬함을 삼았으니 강약을 따질 것도 없다. 대소인원의 모의를 하지 않고도 뜻이 같았으며 원근의 사민들은 소문을 듣고 일제히 분발하였다. > 아! 우리 열읍 수령, 각 처 사민(士民)들아!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빌려 주고 혹은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리라.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로 돌아가서 능히 임금을 위해 난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행동하기를 원한다.''' > ------ > -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고경명]]의 격문. 『제봉선생집』권7, 정기록, 마상격문 나라의 국난 극복을 위해서 민간인들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이 없다면 의병은 생길 수 없다. 하지만 '''조선시대 의병은 국가가 짜놓은 행정, 전시 동원체제 아래 있는 민병대'''이자 근왕군 성격이 강해서 흔히 생각하는 애국심 하나로 분연히 들고 일어난 힘없는 민중 같은게 아니다. [[예비군|처음부터 전쟁 나면 동원하기로 정해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양요에 동원된 민병대나 동학 진압에 투입된 민보군과 포군. 그리고 이들이 주축이 된 구한말 의병부대 다수가 여기 해당된다. 임진왜란 '초기' 의병도 정교하게 짜놓은 동원체제로 원래 관군으로 편입할 인원들이 전시공황 상태로 일시적으로 붕떠버리자, 향청 및 향회 같은 자치 기구에 속한 향촌 유림들이 조직화한 것이고 금세 조선 조정의 행정력 아래 들어가 말만 의병이지 관군이 되었다. 조금 지나면 아예 [[김덕령]]처럼 처음부터 관과 협력해 인증받고 의병을 구성했다. 물론 단순히 의기로 시작했던 조경남 같은 사례도 적지 않지만 규모가 일정이상 커지면 자연히 국가 행정체제 안에 들어갔다. 고려처럼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은 비용도 만만찮을뿐더러 백성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데, 작은 정부를 지향하던 조선에서 이는 큰 부담이라 상비군 규모를 키우는 대신 유사시 동원 가능한 민병대 조직을 갖춰놓은 것이다. 생업에 종사하고 정기적으로 훈련시키다 유사시 지방관이 사령관, 향촌 유림이 장교, [[한량]], 선달이 부사관, 농민들이 병사로 동원되는 식이었다. 이들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물자나 군량등은 관에서 지원해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주로 향촌 유림들이 자신들의 가산을 써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한말 의진 병력의 주축인 포군들은 동원되는 기간동안 급료를 받았다. 해당 의병진의 자금 사정에 따라 12~40냥 가량을 받았고, 해산군인이나 청군 출신 용병들은 거기서 더 받았다. 급료를 받지 못하자 민간에서 약탈을 자행해 의병장들이 이를 저지하느라 고심하는 일도 있었다. 여기에 구한말 의병은 하나 더 고려해야 하는게 있는데 바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존재다. 한말 일정 규모 이상의 의병진치고 고종 입김 안닿은 곳이 없다. 흔히 평민 의병장의 결연한 결기, 민중의식의 확대라고 일컬어지는 신돌석, 안규홍, 홍범도, 채응언 등은 모두 간접적으로 고종의 후원 내지 독려를 받고 봉기했다. 물론 모든 의병진이 고종의 밀지 아래 일어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요 의진은 거의 고종이나 그 측근들의 입김이 조금이라도 미쳤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국권 피탈 이후에도 3.1운동 이전까지 쭉 독립운동 주류가 복벽이었을 만큼 확고한 구심점으로 존재했던 고종의 역할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는 없다. 즉, 조선 의병은 생업에 종사하며 틈틈히 훈련받고 전시에 동원되는 현대의 [[예비군]]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구한말 의진 전력의 중핵을 구성한 포군들은 급료를 받고 싸우는 용병 성향도 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