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열단 (문단 편집) == 상세 == [[파일:dZ7cW9x.jpg]] 창단 당시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었으며 단장을 비롯해 김대지, 황상규가 고문을 맡았고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독립운동가)|이성우]], [[곽재기|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1897)|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독립운동가)|권준]]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이 13명은 [[광복]] 때까지 단 1명도 배신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매우 유명하다. 한편 이 13명 중 단장 김원봉을 포함해 5명이 같은 밀양 동화중학교[* 민족교육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폐교 조치되어 지금은 없다.] 출신으로, 서로 [[이웃사촌]] 관계였기도 하다.[* 그래서 밀양시의 김원봉 생가터에 [[http://www.euiyeol815.or.kr/|의열기념관]]이 세워졌다. 특히 핵심 멤버였던 윤세주 생가는 김원봉 생가에서 10m 거리에 있다. 그냥 태어날 적부터 바로 옆 집 친구였던 사람들끼리 만주에서 독립운동 뛰었던 셈이다.]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 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지만 암살과 테러를 위한 전문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았던 탓에(사실 당시에는 가르쳐줄 사람이나 단체도 없었지만) 작전의 실행에 허술한 점이 많아 암살 대상의 자택 앞에서 귀가할 때를 기다리면서 술을 마시다가 졸아서 놓치는 등 실패할 때가 많았다. 이들 중에는 [[김시현(독립운동가)|김시현]] 열사가 있는데 그는 [[8.15 광복]] 후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시인 [[이육사]]도 의열단 단원'''이었다. '''[[비밀결사]] 조직'''인 탓에 단원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2010년에 기밀 해제된 [[영국]]의 비밀 문서에 의하면 단원이 '''무려 2천여 명에 달했으며[* 쉬운 비교를 위해 예를 들자면 《기드온의 스파이》에 의하면 초기 [[모사드]]를 지휘하던 모사드 부장 등은 모사드의 적정 인원 수를 1,500명 내외라고 보고 그 전후한 범위 내에서 요원들을 양성해 작전에 투입하고 지휘했다. 물론 CIA와 같은 거대 정보기관이 수만 명에 달하는 인력을 운용하고 있는 사례도 있으나 적어도 의열단도 그 규모상으로는 최소한 한 국가 단위의 정보기관급에 달했다고 비교해 볼 수 있다.] [[도쿄]]에도 50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의 작가 님 웨일즈는 김산을 인터뷰해 저술한 <아리랑>에서 1927년까지 체포돼 '''처형당한 의열단원이 무려 700명'''에 달한다고 기록했다. 이 정도의 규모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게 정말로 대단한 사실.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목숨을 희생하기로 한다.]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단체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을 실행하는데 속히 한다.]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의백(義伯,올바른 성품을 가진 지도자) 한 사람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언제 어디서든지 매월 일차씩 상황을 보고한다.]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언제 어디서든지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죽지 않고 살아있어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막심 고리키|하나는 다수를 위하여 다수는 하나를 위하여 헌신한다.]]] >⑩ [[밀정|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단체의 뜻에 배반한 자는 벌한다.] >---- >'''공약 10조''' [[신채호]]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 선언)>[[https://ko.wikisource.org/wiki/%EC%A1%B0%EC%84%A0%ED%98%81%EB%AA%85%EC%84%A0%EC%96%B8|전문 링크]]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 외교론, 준비론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 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 노선을 제시하였다. 의열단은 창단한 지 얼마 뒤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상하이]]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 민족 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 [[김규식]], [[김창숙]], [[신채호]] 등이 실질적인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