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의열단 (문단 편집) === 비판 === 아이러니하게도 의열단은 독립운동계의 내부 분열을 초래하는 역할을 하면서 거센 비판을 들었다. 대표적으로 1928년 10월 의열단원 이구연이 베이징에서 [[박용만(1881)|박용만]]을 변절자라고 혼자 단정짓고 암살하는 일이 일어났다.[* 사실 박용만이 그 즈음 변절했다는 의심을 받고는 있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변절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박용만(1881)|박용만]] 항목 참조.] 박용만은 암살당하기 전까지 한국의 독립운동을 이끌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김원봉은 무장투쟁을 제외한 외교, 개화 등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 형태를 매우 비판했고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해체를 줄기차게 주장했다. 이 때문에 1930년대 중반 임시정부가 큰 위기를 겪기도 했고 김구, 조소앙, 신익희, 지청천 등 임시정부 핵심 요인들과도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우파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대체로 의열단의 활동을 득보다 실이 많다고 생각했다. 일본인 한두 명 암살하는 것으로는 독립운동에 효과가 거의 없으며 오히려 테러로 비판받아 독립운동에 지장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파라고 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테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김구 본인도 1930년대에 할 수 있는 활동은 테러밖에 없어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윤봉길]], [[이봉창]]의 의거를 이끌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장개석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한인애국단 활동을 본 김원봉은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이르렀다.] 거기다 [[사회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던 것도 우익으로 구성되어 있던 임시정부와 기타 독립운동가들한테 이질적으로 비춰졌다. 실제로 [[조소앙]], [[지청천]], [[김규식]] 등이 의열단 계열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결성한 후 의열단 계열에게 밀리게 되었다는 이유로 탈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