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건희 (문단 편집) === 학창 시절 === 1942년 1월 9일, [[일제강점기]] 당시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얼마 안 가 어머니 품을 떠나 아버지 [[이병철]]의 고향인 [[경상남도]] [[의령군]]의 할머니댁에서 3살 때까지 자랐고, 이후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이때도 형과 자취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실 이 시기 이건희 남매가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시기 이병철-박두을 부부의 사이도 매우 좋지 않았다.] 이러한 환경 때문이었는지 이건희의 성격 또한 내성적이 되어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아싸#s-2|혼자서 놀고]] 사색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 지낼 때 괄괄했던 대학생 형들이 아버지의 일본인 부인과 육탄전으로 싸울 때, 초등학생이었던 이건희는 아직 어려 그 싸움을 피했다고 한다. 이 싸움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는데 이병철은 어머니를 생각하며 가끔 일본인 작은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리던 이맹희에게 죽일 기세로 골프채를 휘둘렀으며, 이후 영영 부자 사이가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6.25 전쟁]] 시기인 고학년 때 다시 한국으로 와 부산사범부속국민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4, 5학년을 같이 다닌 권근술 전 [[한겨레|한겨레신문]] 사장 증언에 의하면 부자집 도련님이라 신기한 장난감을 많이 가지고 와 같이 놀긴 했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치지 않던 아이라 그 외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딱히 존재감이 없는 아이였던 모양이다. 그러다 고교시절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서울사대부고]]에 진학했는데, 당시 이건희의 동창인 [[홍사덕]]이[* 이건희와 홍사덕은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서로 건희, 사덕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최규선]]에 따르면 이건희는 홍사덕을 가리켜 내 [[죽마고우]]라고 하였다고 한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107/nd2001070200.html|2001년 한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에서 차관을 많이 들여와야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우리 안보가 튼튼해진다는 둥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는 둥 1950년대 후반 고등학생이 생각하기 힘든 매우 독특한 사고를 가졌다고 한다. 심지어 1965년,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가 개통되었을 때 다들 이거 어떠냐고 할 때 친구들에게 '''"제2한강교는 통일 이후 중요한 역할을 할 다리인데 다리 경간을 좀 더 넓혀도 되었을 것이다."'''는 말까지 했었다고 한다.[* 훗날 양화대교는 교각 사이로 화물선이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교각의 중간을 없애고 대형 아치교로 탈바꿈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리 중간의 교각 간격을 넓힌 후에도 [[경인 아라뱃길|이 다리 밑으로 화물선이 지나가는 일은 없었다.]]] 이때도 이건희는 딱히 말이 없고 행동도 느릿느릿한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학과 공부에도 별 뜻이 없어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사냐고 물어보면 “나는 사람 공부를 제일 많이 한다”는 황당한 답을 했다고 한다. 그게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는지 이후 삼성의 한 임원이 이병철의 눈 밖에 나서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고교생 이건희가 아버지를 찾아가 설득하자 이병철이 두말하지 않고 그 임원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병철은 스스로의 인사관리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고등학생 이건희의 사람 보는 눈을 더 인정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또 이 시절 이건희가 홍사덕에게 느닷없이 일본 소학교 교과서 몇 권을 건네면서 “니 일본어 배워놔라. 니 정도면 두어 달만 해도 웬만큼 할끼다”고 했다. 먹물 좀 들었다는 고교생들에겐 반일감정이 팽배해있던 시절이라 홍사덕이 “그걸 뭐하러 배우노?”라고 뜨악하게 물었더니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봐야 그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사대부고 레슬링부에서도 활동했다고 하며 공부에는 별 뜻이 없었던지 성적은 중간도 못했다고 한다. 이후 [[연세대학교]] 상학과([[경영학과]]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와세다대학]] 상학부에 진학해 졸업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건희 회장 젊은시절.jpg|width=100%]]}}} || || {{{#000,#000 '''이건희 회장 1987년 모습'''}}} || 이 시절 군복무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엇갈린다. 일전에 [[강용석]]은 이건희가 정신질환으로 면제받았다는 주장을 했으나, 그 근거로 든 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한 이야기임이 드러났고, 한겨레신문의 취재에서는 만기 전역은 아니지만 복무를 하긴 했었다는 보도가 있기도 했었다. 이래저래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군 복무를 회피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런데 이에 대한 비판은 이상할 정도로 잠잠한데,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그런 부분이 거의 공개되지 않은 것이 커 보인다. 일단 삼성 측의 공식적인 발표는 "이건희 회장님께서는 육군 현역병 출신으로 병장 만기전역을 하신 분이십니다"이다. 다만, 이건희가 [[현역병]] 출신이 아니라 [[방위병]] 출신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건희가 방위병 전역했다는 이야기는 거의 보통 라이벌 대기업인 [[현대그룹]]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실 지금도 '삼성가 남자라면 인생 낭비가 되는 군 복무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드는 게 낫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긴 하다. 젊을 때는 술도 안 했다고 한다. 권근술 전 사장 말에 의하면 나이가 들어서는 하긴 하지만 잘 하지 못한다고 한다. 와인은 좋아한다는데 정작 와인 얘기를 하자 무관심했다는 소리도 있다. 자동차 매니아인 그는 유학생 시절 중고차를 사서 샅샅이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곤 했다. 4,200달러에 중고차를 사서 3~4달쯤 타고 다니며 분해해 본 뒤 수리해서 판매한 결과 700달러의 이윤을 남겼다. 유학시절 동안 중고차 6대를 수리해서 팔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