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건희 (문단 편집) === 삼성의 회장이 되기까지 ===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66년 10월 [[중앙일보]]·[[동양방송]]에 입사한 뒤[* 다른 계열사도 아니고 하필 왜 언론사로 입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병철]]은 언론 사업에 대한 애정이 상당했고, 외국의 언론 재벌들이 사회의 존경을 받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에 언론사에서 경험을 쌓아 큰 성과를 내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건희를 언론사에 입사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삼성의 핵심 주력 계열사가 되는 [[삼성전자]]는 이건희가 입사한 지 3년 후에 창사되었다.] 1968년 주식회사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78년 삼성물산주식회사 부회장, 1980년 중앙일보 이사를 거쳐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이 되었다. 이병철의 장남도 아니고 셋째 아들인 이건희가 삼성을 물려받은 것이 전통적인 재벌 구조에서는 조금 의아할 수 있는데, 이는 1969년 말 이건희의 형들인 [[이맹희]]와 [[이창희(기업인)|이창희]]가 아버지를 청와대에 고발했던 사건, 일명 [[왕자의 난#s-2.2]]을 터뜨리는 바람에 후계구도에서 쫓겨난 탓이 크다. 똑같이 왕자의 난이 일어났던 현대에서는 [[정주영]]의 사망 직전(2000년), 즉 정주영의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상황에서 왕자의 난이 벌어지는 바람에 아들들이 자신의 지분을 갈라 먹는 것에 성공해서 현대그룹이 분열된 것이지만, 삼성가에서의 왕자의 난은 이병철이 반란을 진압할 힘과 권위가 있었을 때[* 이병철은 이 사건 이후 18년이 지난 1987년에 사망한다.] 벌어졌고, 그 결과 이맹희와 이창희가 완전히 진압당해 내쳐졌다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마지막엔 배다른 형제 이태휘와도 경쟁하기도 했다.[* 제프리 케인의 삼성 라이징에 따르면 이병철이 실제로 이태휘를 후계자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건희가 미국에서 큰 교통사고를 당한 후 잠시 의료용 마약에 중독된 적이 있는데, 여기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태휘와 경쟁시켰다고 서술하고 있다.] 물론 후술하겠지만 이건희 본인이 나름 능력을 보여준 덕도 있다. 사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이건희는 형이 두 명이나 있어서 삼성의 회장이 되리라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맹희의 무능과 이창희의 [[왕자의 난|반란]] 등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이건희에게 기회가 왔고, 이건희는 두 형들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인 이병철의 마음에 들 정도의 업무성과를 내면서 후계자로 굳어졌다. 특히 [[동양방송]](TBC)이 [[전두환]]에 의해 KBS에 강제 통폐합되기 전까지는 드라마 부문을 직접 챙겨서 키웠을 정도로[* 드라마에 대한 이건희의 통찰력을 드러낸 일화를 소개하자면 자사 소속 중견 배우였던 [[강부자]], [[이순재]], [[여운계]] 등의 급여 지급과 대우에 신경 쓸 것을 드라마 제작진들에게 주문했는데, 그 이유가 걸작이었다. '''"주연은 얼굴 반반하고 적당히 연기하면 되지만, 극을 살리는 건 조연이니까 잘 챙겨줘야 한다."''' 그 덕에 [[언론통폐합]] 이전의 TV 3사 드라마 중에서는 TBC 작품의 인지도와 시청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의욕적이었고, 성과도 꽤 좋았다. 삼성그룹 내부 경영진의 반대에 개인 사재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적자 상태였으며 초라하게 삼성전자에 흡수되었다. 이병철은 NEC에게 삼성 반도체에 대한 개선을 자문하나 거절 당하였고, 기술협력 요청마저 NEC가 거절하자 대체 반도체가 뭐길래 NEC가 이렇게 나오는지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고, 결국 도쿄선언으로 반도체 투자에 나설 것을 지시한다.[[https://m.etnews.com/20160810000365?SNS=00004|#]] 이 과정에서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이건희에게 자연히 힘이 쏠리게 된다. 또한 삼성전자 내부의 반도체 반대론자들도 이병철에 의해 모두 정리되었다. 이병철 생전에는 삼성전자는 반도체 투자와 일본이 벌인 치킨게임으로 흔들렸지만,[* 이 당시 누적 적자가 수천억에 달하면서도 추가 투자 결정하자 삼성전자 내부에서는 이병철에게 반대 의견이 빗발쳤으나 그는 '내한테는 돈냄새가 난다'면서 쿨하게 무시했다고 한다.] 이병철이 사망할 즈음인 1987년 말부터 반도체 경기가 회복되고, 1988년 반도체 사업부가 3200억 흑자를 내면서 내외부에선 도박으로만 보였던 이병철-이건희 두 부자의 반도체에 대한 집착은 놀라운 혜안으로 드러났다. 이건희는 두 명의 스승으로 아버지 이병철과 장인 [[홍진기]]를 꼽았다. >“선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내게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주지는 않으셨다. 현장에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셨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감이다’는 체험적 교훈을 배웠다…한편 장인은 기업 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문답식으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결국 나는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문(文)과 무(武)를 동시에 배운 셈이다.” 이건희는 퇴근 후에 사람들과 어울려 술 마시고 놀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주로 기술 관련 서적을 탐독하거나 전자제품, 각종 기계류를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연구를 거듭했다.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관련 전문가들을 집으로 불러다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삼성 부회장 시절 사석에서 “주말에 우리집으로 초청해 한수 배운 일본 기술자만도 수백 명이 넘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NEC, 도시바, GM, 휴렛팩커드 등 세계 유수 기업의 CEO들도 방한 시 이회장 자택을 주요 방문지로 잡는다. 그의 한남동 자택을 자주 찾는 한 재계 인사는“이 회장의 서가엔 경영학 서적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반면 미래과학,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공학 등 이·공학 관련서적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데, 전집류가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 책들은 이회장이 직접 한 권 한 권 골라 읽은 것 같았다.“고 전한다. 웬만한 전자제품은 콩알만한 부품의 기능 차이까지 꿴다고 한다. 국산 제품과 외국산 제품을 갖다놓고 부품 하나하나를 비교하며 품질 격차의 원인이 된 부품을 밝혀낸 뒤 계열사 기술담당 임원을 불러 그것을 쥐어주기도 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