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규보 (문단 편집) === 관직 생활 === [[명종(고려)|명종]] 말년에 자기 스스로 [[추천서]]를 써서 [[재상]]들에게 보냈고 재상들 역시 이규보를 명종에게 추천했으나 이규보를 싫어했던 사람이 있어서 등용되지 못했다. 그후 몇 년 간 저술 활동을 하다가 32세 때 [[전주시|전주]]의 하급관리로 임명되어 벼슬을 얻었는데 1년 3개월 만에 교체되었다. 상관이 [[재물]]을 탐하는 것에 대해 굽히지 않고 간언하다가 [[높으신 분들]] 눈 밖에 나버렸다. 그렇게 30대를 보냈는데 이규보 본인이 문집에서 밝힌 바로는 30대에 이미 귀 밑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고 한다. 그 사이 경상도 지역에서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아직 임관되지 못한 사람 중에서 종군 문관을 뽑으려고 했는데 이규보는 여기 자원해서 약 1년 정도 반란 토벌군에서 종군했다. 정식 직함은 '병마녹사 겸 수제'. 그런데 반란군 [[토벌]] 후 돌아온 뒤에 다른 사람들은 다 [[논공행상]]으로 벼슬이나 포상을 받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규보만 받지 못했다. 그래서 보다 못한 [[관리]]들이 왕에게 추천하여 직한림원에 임명되기는 했는데 그나마도 임시직. 실무는 모르면서 글만 좋은 [[백면서생]]도 아니고 나름대로 간언도 하고 일선에서 고생해가며 공을 세웠는데도 여주 출신 한미한 가문 소생이라는 이유로 바닥을 전전하며 젊은 시절이 다가버렸다. 이렇게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던 이규보에게 인생을 뒤바꿀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니, [[이의민]] 이후 당대 최고 권력자에 오른 [[최충헌]]이 이규보에게 문장을 적게 했는데, 특유의 문장력을 선보이며 최충헌을 감탄시켰던 것. 최충헌은 이규보의 한림원 벼슬을 [[정규직]]으로 바꿔주었고 이후로도 최충헌의 초청을 받아 문장을 지어 올림으로써 최충헌의 신임을 받았다. 이후 계속 [[승진]]하여 마침내 이규보가 초로의 나이에 접어든 [[여몽전쟁]]기에 고려 조정을 총괄하는 재상 직에 올랐다. [[재능]]에 비해 비교적 늦게 출세한 [[대기만성]]형 인물. 다만 그러다보니 [[최우]]의 [[강화도]] 천도에 찬성하는 등 문제가 많은 "최비어천가" 행보를 보인 것이 다소 흠이라면 흠. 사실 보잘 것 없는 뒷배경 때문에 늘 뒷전에 밀렸다가 최씨들의 눈에 들어 겨우 [[출세]]한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긴 하다. >[[몽골 제국|오랑캐 종족]]이 완악하다지만 어떻게 물을 뛰어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명령하겠느냐.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거라. >그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 >- 동국이상국후집 권 5 고율시 89수 그러나 위의 [[시]]에서 볼 수 있듯 '최비어천가'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시의 내용이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현실]]과 너무 괴리감이 심하여 [[백성]]들의 고통은 완전히 무시되는 등 최씨 [[정권]] 관련 찬양 정도가 매우 심했다. 정작 [[여몽전쟁]] 동안 최씨 정권은 백성들의 삶을 망가뜨리는데 누구보다도 앞장 선 [[내부의 적]]이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여몽전쟁을 제대로 이끌어 항쟁하는 것이나 여몽전쟁에서 빨리 항복이라도 해서 피해 최소화를 노려볼 생각도 없었다. 당시 최씨 정권이 이런 어정쩡한 태도로 [[몽골]]과 대립하면서 질질 끈 이유는 몽골이 진짜로 이길 경우 [[권력]]을 잃을까봐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국왕]]은 [[허수아비]]였고 실권을 쥔 [[최우]]는 몽골의 1차 침공 때 방어선 역할을 하던 귀주성과 자주성에게 항복을 강요했는데 권력을 잃을게 무서워서였다. 귀주성과 자주성에 [[수도(행정구역)|수도]]인 [[개성시|개경]]의 [[병력]]을 보태면 1차 침공을 시전하던 몽골군을 물리칠 여력이 있었는데 이길 기회를 스스로 날려먹은 것. 이래놓고 최우는 몽골의 2차 침공의 빌미를 스스로 만들어놓고서는 몽골의 3차 침공 당시 [[강화도]]에 틀어박혀서 [[국가]] 사정은 뒷전으로 하고 [[사치]]부리고 놀았다. 이규보는 이런 최우에게 열심히 [[아첨]]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몽골이 쳐들어와서 [[국토]]와 백성들의 삶을 짓밟고 최씨 정권이 질 좋은 병사들은 죄다 [[사병]]화를 시켜버려서 나머지 [[관군]]들의 질적 저하가 이어졌다. 실제로 관군화된 최씨 정권의 사병들([[야별초]])은 최씨 정권이 실권을 쥔 동안 몽골군과 대치한 적이 5번 정도인데, '한계성 전투'의 경우 여몽전쟁 시기에 같은 [[고려인]]끼리 싸운 것들이다. 사병들 중에서도 사병에서 벗어나 몽골군과 싸우는 관군에게 참여하려던 사람들이 있기는 했으나 최씨 정권에게 막혀서 이들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례는 최씨 정권이 몽골에게 왜 어중간한 태도로 저항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최우의 글씨를 칭찬하며 '신품사현(神品四賢)'으로 추켜세운 사람도 바로 이규보였다. 후대 유학자들에게 본인 특유의 문장력은 높이 평가받았지만,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이규보는 행보나 성품에 있어서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듣진 못했다. 현대로 친다면 [[서정주]]와 비슷한 평가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작품들은 지금도 문학적, 현실적으로 가치가 높아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자주 실리는 편이다.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낮은 직책 전전하며 고생하고, 토벌군에 종군하여 참담한 실상도 봤던 이규보의 글에는 문인으로서는 현실을 다룬 이야기가 많다. 자신도 그렇고, 문학 세계도 그런 편이다. 다만, '최씨정권'이라는 강력한 벽으로 인해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울 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