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근(조선) (문단 편집) == 생애 == 아버지 이희필(李希泌)과 어머니 [[무안 박씨]] 박천무(朴天茂)의 딸 사이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388년(우왕 14)에 좌부대언이 되고, 1389년(공양왕 1) 우왕·[[창왕]]이 서인(庶人)으로 될 때 숙부 이림과 함께 원지에 유배, 얼마 뒤 석방됐다. 이듬해 1390년 3월 좌상시(左常侍)에 임명됐다. 같은 해 5월에 윤이·이초의 옥사가 있었는데, [[김사형]]이 [[형조]]의 관원들을 부추겨 찬성사 [[정몽주]]를 탄핵[* 당시 윤이와 이초의 당인 우현보 등이 사면으로 비교적 가벼운 벌을 받고 조정에 남아있었다. 김사형과 사헌부, 형조에서는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정몽주는 홀로 이들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하게 한다. 먼저 형조판서 안경공, 성석연 등이 파직되고 이근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데, 이근도 마찬가지로 정몽주를 비롯해 좌상시 정우(鄭寓), 좌사의(左司議) 최운사(崔云嗣)를 탄핵한다. 낭사들이 "탄핵은 형조의 임무가 아닙니다."[* 彈劾非刑曹之任.]라고 하니 이근은 역으로 낭사들을 탄핵하면서 이는 정몽주가 대신을 음해하려는 것으로 마땅히 국문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근은 파직되고 10월에 염문계정사(廉問計定使)가 되어 경상도에 파견, 1392년 개경으로 돌아와 이조판서에 이어 우대언이 됐다.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 3등에 녹훈되고 좌승지가 됐다. 1393년에 대사헌이 되어 동국 역대 여러 현인들의 비록을 두루 상고하여 요점을 추려서 바치기도 했다. 1396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종묘감독관에 이르렀다. 1398년 [[1차 왕자의 난]]에 관련되어 주살되고 관직도 추탈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