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기택 (문단 편집) == 평가 ==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 신군부 정권 하에서 ‘야당 외길’을 걸으며 이른바 ''''[[4.19]] 세대''''의 자존심을 지켜왔다. 1970~1980년대에는 민주진영에서 김대중, 김영삼의 바로 아랫자리를 차지한 인물이었으며, 김영삼이 여권으로 넘어간 이후에는 김대중에 이어 제[[2인자]]의 위상을 유지했다. 현재까지도 최연소 야당 사무총장, 최연소 부총재의 정치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때 [[김영삼]], [[김대중]]을 이을 포스트 양김시대 대표 주자로 인식되며 야권 차세대 주자 여론조사 1위(1994년)의 기염을 토하기도 했으며, [[시사저널]] 한국을 이끄는 인물 10인에 4년 연속 등재되었다. 외모는 정치인이 아닌 대학교수를 연상케 하지만, [[조기축구]]와 새벽 달리기로 체력을 연마한 강골이었으며, 키도 크고 듬직한 성품이어서 주변의 평판이 좋았다. 무엇보다 '4.19세대'의 대표적 인물이라는 상징성은 그가 가진 최고의 정치적 자산이었다. 1960년 4.19 민주혁명에서 고대 학생으로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1979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선명야당을 선언했고, 1987년 단식투쟁으로 6.10 항쟁의 기폭제[* "전두환이 4·13 호헌 조치로 군사정부 유지를 시도하자 이기택 총재는 호헌 철회를 요구하며 15일 동안 곡기를 끊었습니다. 노태우 후보의 6,29 선언, 즉 직선제 수용을 이끌어낸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SBS)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55&aid=0000458115&sid1=001|#]]]가 되기도 하는 등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3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나이에 비해 직위가 너무 빨리 올라간 탓인지 정치적 감각이 부족해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했다.[* 한 예로 야당 대표 시절에는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공천을 하면서 명분이나 당선 가능성보다는 계보나 인맥 위주의 공천을 하여 생각보다 작은 그릇을 보여주었다.] 만약 1992년 제14대 총선 당시 부산에 출마하여 지역감정에 정면으로 맞섰다면, 노무현이 받은 스포트라이트를 그가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는 1990년 [[3당 합당]] 때 차라리 김영삼을 따라갔다면, 김영삼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제로 김영삼은 [[김동영(정치인)|김동영]]과 [[최형우]]의 부재만큼 이기택을 아쉬워했다. 혹은 김대중의 정계 복귀를 받아들이고 그와 협력했다면, 포스트 양김 시대를 노무현이 아닌 이기택이 열 수도 있었다는 평가가 여전히 존재한다.[* 사실상 대통령 노무현을 만든 초기 친노 보좌진 멤버 중 [[조광한]], [[윤태영(정치인)|윤태영]] 등 다수가 이기택이 육성한 북아현동 사단이 주축을 이룬다.] 정치경력의 사실상 마지막 순간에 통합민주당을 신한국당과 합당시키지 않고 노무현이 대선 후보가 될 때까지 그 간판만이라도 계속 지키고 있었다면, 민주당계 정당의 법통을 지켜온 존경받는 원로로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참여정부]] 시기 원로 역할은 이기택과 동갑인 [[김원기]]에게 주어졌는데, 정치 경력이나 중량감 등에서 이기택이 앞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기택이 민주당 간판을 지키다 노무현에게 합류했다면 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파일:KT_BW 1980년대 (61).jpg|width=300]] 독자 계보 수장으로 양김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던 당대 유일한 정치인이면서 김영삼, 김대중의 결정적 대권 시기에 대적해 두 인물과 상도동, 동교동 양대 계보의 집중견제를 받았다. 그래서 그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문희상]] 前 국회의장은 이기택에 대해 "좌절된 영웅"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1979년의 '5.30 전당대회'와 1987년의 '호헌철폐 단식투쟁', 1991년 '민주당 통합' 등 근현대 정치사의 굵직한 사건으로 보여준 이기택의 정치철학은 사후 재평가되고 있다. "선명한 정의"와 "영호남 화합", "야당 통합"으로 요약되는 이기택의 정치 인생은 사실상 양김 시대와 함께 저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망 이듬해인 2017년 회고록 "우행"이 출간돼 출판기념회가 9월25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려 500여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故 이기택 회고록 '우행' 출판기념회에 옛 동지들 대거 출동 (연합뉴스)" [[http://naver.me/Fg8BKY6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