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기택 (문단 편집) === [[문민정부]] 시대 === [[파일:PR-대통령+영부인%2FPR-1994%2F칼라%2FPR-1994-0138%2F2400dpi%2FPR-1994-0138-002.jpg|width=400]] '''<김영삼 · 이기택의 영수회담>''' 민주당 대표가 된 후 [[국가보안법]] 폐지, 6공 비리 청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한민국-미국-북한의 3자 회담 등을 주장하며, 90여 명의 민주당 의원들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당내 [[동교동계]]와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게다가 이기택의 부상은 김영삼에게는 PK 정치적 기반의 붕괴였고 김대중의 정계 복귀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에 양김의 견제가 계속되었다. [[파일:20190205_050932.jpg|width=500]] '''<1994년 국회본회의 민주당 대표연설>''' 한반도에 전쟁위기가 몰아닥친 1994년 야당 대표로서 방북을 추진하고,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한민국-미국-북한의 3자 회담을 주장했다. 그 후 1995년 6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동교동계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천한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 민자당 [[이인제]] 후보에게 패배하면서 당내 리더십에 타격을 입고 말았다. 당시 김대중이 영국 외유를 마치고 돌아와 정계 복귀가 임박한 시점이라 이기택은 초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는 후일담. 결국 김대중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재야 시민운동가들이 창당한 개혁신당을 흡수하여 [[통합민주당(1995년)|통합민주당]]을 창당한 뒤 [[조순]], [[노무현]], [[이부영]], [[이철]], [[김원기(1937)|김원기]], [[제정구]], [[김정길(1945)|김정길]], [[홍성우(1938)|홍성우]], [[서경석(목사)|서경석]], [[강창성]] 등 쟁쟁한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긴 하였으나, 문제는 이들이 야당과 재야의 스타 군단이라 자기 주장이 너무나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것.[* 명단을 보면 알겠지만 모든 정치권이나 재야 민주화 운동, 시민운동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평범한 국회의원급은 뛰어넘는 지명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이 때문에 당시 통합민주당은 스타 군단으로 불렸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게 마련.] [[파일:external/image.pressian.com/10101025181154(1).jpg|width=550]] '''<통합민주당 최고위원회의>''' 왼쪽에서부터 [[노무현]], [[김종완(정치인)|김종완]], [[이규택]], [[양문희]], '''이기택''', [[김원기(1937)|김원기]], [[이부영]], [[강창성]]이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당 고문으로서 [[해운대구]]-[[기장군]] 갑 지역구에 출마했다가 [[신한국당]] [[김운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당시 정치적 지지 기반인 부산경남을 사수하기 위해 김영삼은 여당의 화력을 집중했다.] 그가 이끌던 통합민주당은 수도권에서 중도층의 지지를 일부 흡수하긴 했지만[[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5082|#]], 기존의 30석에서 15석(지역구 9석 + 전국구 6석)으로 의석이 반토막나면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였고, 같은 야권의 경쟁 상대인 새정치국민회의에 비해 너무나도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울특별시 지역에서는 양천구의 [[서경석(목사)|서경석]] 목사를 비롯한 쟁쟁한 후보들을 내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강동구 갑의 [[이부영]]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낙선을 면치 못했고, 거의 전지역 3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부산광역시에서는 전원 낙선이었다. 그나마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몇 개의 의석을 건지긴 했으나, 김영삼의 [[신한국당]]이 과반수 확보를 위해 [[황규선]](이천시), [[이규택]](여주군), [[최욱철]](강릉시 갑) 등의 당선자 빼가기에 나서면서 폭망 확정.] 물론 김대중의 국민회의도 이때 상당히 부진했으나, 무엇보다 [[김종필]]의 [[자민련]]이 50석으로 크게 약진한 것과 크게 비교되었다. 1997년에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1997년 재보궐선거|재보궐선거]]에서 죽어가는 당의 명운과 함께 자신의 마지막 정치적 생명을 걸고 출마하였다. 그러나 [[무소속]]으로 출마한 [[박태준]]에 밀려 낙선. 사실 태어나기는 포항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의 정치적 기반을 부산에서 잡은 이상 당선되기는 어려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상대가 포항의 경제를 쥐고 있는 [[포항제철]]의 창립자이니 이건 처음부터 안되는 싸움이었다. 울산 동구의 정몽준급이라고 봐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