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기택 (문단 편집) === 말년 === 이후 통합민주당을 [[신한국당]]과 합당시키는 결단을 내렸다.[* 이때 조순, 이부영, 김부겸, 이철과 제정구는 이기택을 따라 한나라당으로 갔다. 그러나 노무현, 김정길, 김원기는 이기택과 결별하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로 합류하였다.] 이기택으로서는 DJ, YS, JP 3김을 중심으로 한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1996년 김대중의 정계 복귀 뒤에 김대중과 갈등이 크게 겪는 과정 속에서 통합민주당이 와해당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3김 정치 청산을 내세운 이회창과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해서 [[한나라당]]을 창당했으나, 결국 1997년 12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2000년에는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했다. 당초 이회창은 이기택에게 전국구 출마를 권유했지만 이기택이 연제구 출마를 고집하자 공천 탈락시킨 것. 이기택의 위상을 생각하면 모욕에 가까운 처사였다. 같은 처지가 된 [[김윤환(1932)|김윤환]], [[이수성(정치인)|이수성]], [[신상우]], [[조순]] 등과 함께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민주국민당(2000년)|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부산광역시 [[연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현직 의원인 [[최형우]]는 와병중이어서 16대 총선에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지역구가 애매한 상태였던 이기택이 이 동네 출마를 노린 것.], 한나라당 [[권태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2002년 초에 측근 [[손태인]] 의원[* 더군다나 손 의원의 미망인은 지역구를 이기택 전 총재가 이어받는 것이 고인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이 사망하면서 한나라당 후보로 보궐선거에 출마한다는 관측이 있었으나, [[서병수]] 전 해운대구청장이 공천되면서 엎어졌다. 이후 신상우 등과 함께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 [[부산상고]] 후배이고, 민주당을 함께 창당하기도 했으며, 노무현 초기 측근들이 이기택계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를 지지하였으나,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로는 참여정부와 거리를 두었다. [[파일:20180424_043150.jpg|width=500]]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기택>'''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고려대]] 상대 후배이고, 고향(포항) 후배이기도 하다]를 지지하였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되었다. 평통 수석부의장에서 물러난 뒤로는 '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 이사장과 '4.19 혁명공로자회' 회장, '범시민사회연합' 상임고문, '글로벌 피스포럼' 대회장 등으로 활동하던 중 2016년 2월 20일 사망했다. 장례는 시민사회장[* 장례식 모습 : [[http://m.blog.naver.com/binnie06/221122354264]]]으로 5일 간 진행되었다. 사망 전날 여의도 사무실에서 6년 간 준비해온 [[자서전]] 원고 작업을 끝냈고, 사무실을 나오면서 "아, 큰일을 마쳤네"라고 말할 정도로 흡족해 했다고 한다. 평소 지병 없이 건강했는데, 그 다음 날 아침 갑자기 사망했다고. 상술되었듯이 4.19 혁명 당시 고려대학교 학생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라서 사후 [[서울]] [[강북구]]의 [[4.19 혁명#s-8.3|국립 4.19 민주묘지]]에 안장[* 영결식 모습 : [[http://m.blog.naver.com/binnie06/221122869297]]]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