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덕형 (문단 편집) == 생애 == 조선 중기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인 [[광주 이씨]] 출신이다.[* 이 집안은 조선 초, 중기 최고 권력 가문의 하나였지만 [[연산군]] 때 멸문지화라 부를 정도로 크게 타격을 입는다. 자세한 것은 [[이극돈]] 및 [[무오사화]]와 [[이이첨]] 항목을 확인. 한창 때는 성종이 "아들을 낳는다면 광주 이씨 같은 아들을 낳아야 할 것이오."라고 할 정도로 인재들이 많았다.] 한성 성명방(誠明坊: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의 사이)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류전[*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매우 비상했다고 전해진다. 후술할 유희서의 부친. 활을 쏘던 어떤 무인에게 "그 화살통이 마음에 드니 나에게 줄 수 없겠는가?"라고 청했다가, 그 무인에게 "화살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의 이름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라는 말로 거절당한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이순신|그 무인은 뒷날 조선을 구한다]]'''.]의 누이 동생인 어머니 류씨(柳氏) 사이에서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소년기에는 영의정으로 있던 유전의 집이 있던 경기도 [[포천시|포천]]으로 가서 성장한다. 자라면서 영특하다고 명성이 돌았으며, 이후 토정 [[이지함]]의 눈에 띄어, 그의 조카로 동인의 중진이자 이후 북인의 영수가 되는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다. 1580년 약관 20세 나이에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을과 1위라 2위다. 당시 기본적인 과거 합격자는 등급을 갑과, 을과, 병과로 나뉘어 갑과(제1위라 칭한다)를 3명, 을과(제2위라 칭한다)를 7명, 병과(제3위라 칭한다)를 23명으로 총 33명을 뽑았다. 물론 그 사이에서도 등수를 나눠 벼슬을 다르게 하였다. 그러나 별시는 기본적인 정기 과거 시험이 아니라서 왕이 원할 때 치렀고 합격자 인원은 당시 관리 자리가 부족할 때 뽑는 시험이다 보니 그 부족한 만큼 유동적으로 하여 보통 33명보다 많이 적었다. 그러니 실제로는 합격자 수가 더 적어 더 치열했다.] 이후 대제학 [[이이(조선)|이이]]의 눈에 들어[* 묘지명에도 이항복과 함께 이이의 추천을 받았던 이야기가 나온다.] 승승장구 하며, 1591년 예조 참판에 오르고 겨우 31세에 대제학을 겸임했다. 당시 이덕형의 학문과 인품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조선 역사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 사신과 교섭을 벌이기도 했으나 결렬되었다. 그후 청원사로 [[명나라]]로 가 [[만력제]]를 설득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얻어오는 데 성공한다. 이항복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군사 정책을 수행하였다. 1598년 38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었다. 40살 이전에 정승이 된 케이스는, 세조 때 구성군 이준 이후 최초다. 그나마도 이준은 종친이었고 세조의 정치적 판단으로 인해서 능력보다는 라인 잘 타서 정승된 케이스. 이덕형 역시 선조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재상이 되었지만 그의 능력이 없었으면 재상이 되었을리 만무하다. 1884년에 갑신정변 당시 [[홍영식]]이 당시 만 27세의 나이로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었으나 정변을 일으켜 된 것이므로 실력으로 되었다고 볼 수 없다 이후 좌의정, 1602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이 영의정 역시 구성군 이준과 같은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조선 역사상 최연소 기록이다. 이항복과 함께 현실적인 판단으로 임란 극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임해군]]의 처형을 반대하다가 광해군의 눈 밖에 났다.[* 임해군이 이덕형의 외사촌이자 형제보다 더 가까운 사이었다는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덕형은 임해군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주장했다. [[대인배]] 인증. 하지만 임해군은 어차피 사형당할 이유가 너무 많았다. 사형시키려는 이유가 좀 억지여서 그렇지.] 이덕형은 편의상 친인척에 따라 [[남인]], [[북인]]과 모두 이어질 수 있는 범 [[동인(조선)|동인]] 계열로 분류되나 본인 스스로 [[붕당]]과 거리를 두었고, 1613년 유일한 동지였던 [[이항복]]이 축출되면서 정치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덕형은 결국 이항복 없이 혼자서 무리하게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사형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가 역적을 옹호했다는 혐의로 탄핵당하고 삭탈관직되었다.[* [[계축옥사]]에 영창대군을 끌어들인 건 누가 봐도 어거지였지만 일단 역모에 말려든 이상 처벌 자체를 막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이 시기의 [[광해군]]은 역모 사건이면 거의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옥사를 무한정 확장시켜 나갔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덕형은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은 국왕이 법을 어기는 행위라며 처형에 반대하고 은혜를 베풀 것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해지면서, 실의에 빠져 시골집으로 돌아간 지 2개월 만에 숨졌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이덕형의 본관인 광주 인근인 [[양근군]]이었지만,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해당한다. 조안면 송촌리에 이덕형이 말년을 보낸 별장 터가 유적지로 남아있다.] 이덕형의 죽음을 들은 이항복은 곧바로 이덕형의 사저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을 하고 그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야사(역사)|야사]]에 따르면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할 때 이덕형은 [[이항복]]도 함께 해주기를 원했지만 이항복은 거절했고, 삭탈관직된 이덕형은 실의에 빠졌다가 곧 사망했다. 이덕형은 사망한 후에도 눈을 감지 않고 있었는데, 이때 이항복이 찾아와 자신이 함께 하지 못한 이유("이제 곧 [[인목왕후|폐모론]]이 일어날 텐데, 그때 반대하다가 죽음을 맞이할 신하가 하나 남아 있어야 하지 않겠나")를 설명해 주자 그제야 눈을 감았다고 한다. 실제로는 이덕형이 독촉해서 결국 이항복과 함께 반대 의견을 올리는 것으로 결정되었지만, 그 사이에 이항복이 천거한 인물이 광해군 연간을 휩쓴 옥사의 수많은 피해자들 중 하나로 걸려들면서 이항복 본인도 축출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복귀한 이항복은 이후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완전히 실각하고 [[함경도]]의 [[북청도호부]]로 [[유배]]된 뒤 사망했다. 남인계와 서인계 전반에서 두루 존경을 받던 정치 원로 이덕형과 이항복의 실각과 죽음으로, 두 당파는 광해군과 집권세력인 북인에게 [[인조반정|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평군/행정#양서면|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묘지명]]은 평생 친구인 이항복이 썼다.[[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260A_0040_010_0020|링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