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동휘(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이후의 행적 === 1921년 5월 상하이 공산당 사무소에서 고려공산당대표회를 개최한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창당을 공표하고 중앙 총간부를 조직했다. 이 대회에서는 [[코민테른]] 파견 대표로서 이동휘, 박진순, 홍도 등 3명을 선정했다. 이들에게는 고려공산당의 창립에 대한 보고와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아내는 임무가 주어졌다. 1921년 6월 19일 상하이를 떠난 그는 인도양, 수에즈 운하, 지중해, 알프스 산맥, 독일을 거쳐 4개월 만인 10월 말 레닌그라드에 도착했다. 고려공산당 대표단은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지도자들을 면담하고 [[자유시 참변]]을 비롯하여 슈미야츠키와 이르쿠츠크파의 불법적 활동과 전횡을 설명했다. 이에 국제공산당집행위원회 검사위원회는 상해·이르쿠츠크 양파의 주장을 검토하고 11월 15일자로 결정서를 발표해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인정하고 이르쿠츠크 군감옥(軍監獄)에 갇혀 있던 상해파 당간부들과 자유시 참변 당시 체포된 장교와 병사 80여 명을 전격 석방시키게 했다. 1921년 12월,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의 자격으로 홍도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가서,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 당국자들과 파쟁의 중단과 연합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에 합의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여할 조선대표단의 집행위원회 간부들과도 회합을 갖고 국민대표회준비위원회 구성안에 합의하였다. 합의된 국민대표회준비위원회는 조선혁명을 대표하는 5개 민족그룹인 조선대표단, 고려공산당중앙위원회, 상해의 국민대표회준비회, 상해임시정부, 국민의회의 대표 20인으로 구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는 이르쿠츠크파 인사들이 장악해버렸다. 그들은 이동휘의 대리인으로서 모스크바에 남아있던 박진순의 대회 참여를 저지하고 숙소인 룩스 호텔로부터 축출해버렸다. 이동휘는 모스크바로 귀환한 뒤 이 일을 보고받자 크게 분노하여 대회의 선언서에 대한 서명을 거부하고 이르쿠츠크에서의 모든 합의 사항을 백지화했다. 이로 인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 파와의 연합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1923년 초 코민테른이 고려공산당을 해산시킨 뒤 꼬르뷰로(Korbureau)를 새로 조직시켰다. 이때 이동휘는 이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민의회파의 한명세와 대립하다가 한명세를 일방적으로 지원하는 국제공산당 동양부의 정책에 반대하여 그해 말 꼬르뷰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조직한 적기단(赤旗團)을 지도하였으며, 국내에서의 조선공산당 활동을 간접적으로 후원하였다. 1925년 4월 이르쿠츠크계열의 화요파가 단독으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대표단을 파견하여 코민테른의 승인을 신청하자, 코민테른은 이동휘에게 승인 여부를 물었다. 이때 이동휘는 국내에 있던 [[김철수(독립운동가)|김철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승인 의사를 밝혔다. 이리하여 1926년 초 2차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연합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두 정파간의 대립은 심각했다. 1926년 가을 새로운 파벌로 등장한 ML파의 3차 조선공산당에 대항하여 1926년 말 서울·상해파 연합의 조선공산당(춘경원당)이 성립되자, 이동휘는 서울‧상해파의 대표로서 6차 코민테른대회에 파견되기도 했다. 1930년대 초반, 이동휘는 일본 통치하의 국내 감옥에 수감된 항일투사와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의 가족을 후원하기 위하여 조직된 국제혁명자후원회(MOPR)의 원동지역 한인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는 1932년 10월 12일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원동변강모플열성자대회에서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던 1935년 1월, MOPR의 모금을 위해 수청(현 파르티잔스크) 지방을 방문한 그는 얄촘 탄광으로 나오던 길에 거센 눈보라를 만나 심한 독감에 걸려 쓰러졌다. 이후 급히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옮겨졌고, 한인 의사들이 전력구호에 나섰으나, 1935년 1월 31일 오후 7시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향년 62세.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 이동휘의 사망 소식은 <선봉> 1935년 2월 2일자 4면에 각기 다른 명의의 부고를 통해 알려졌다. 첫 번째 부고는 박동희, 한용헌, 이문헌, 박우, 김하석, 최길만, 정한립, 채동순, 최의수, 황동흡, 최중천 등 11명의 명의로 된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부고는 MOPR 연해주위원회와 장례위원회 명의, 세 번째는 블라디보스토크 빨치산코미씨야(위원회) 명의였다. 이후 장례식은 2월 4일 오후 4시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신한촌에서 가까운 다친거우재에서 치러졌다. 한인 공산주의자 김아파나시, [[김미하일]], 그리고 당시 연해주 한인 사회의 유력한 지도자들이 장례식을 주도했다. 그러나 장례식에 참석한 인사들은 1938년 [[스탈린]]이 [[대숙청]]을 감행했을 때 상해파 인사로 간주되어 대부분 시베리아로 유배되거나 처형되었다. 이동휘의 사망 소식은 일본영사관을 출입하던 기자가 이동휘가 “고령과 피로”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망했다는 [[프라우다#s-2|프라우다]]지의 기사를 전함으로써 국내에도 알려졌다. [[동아일보]] 1935년 2월 15일자에 이동휘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었고, 설태희(薛泰熙)와 [[안창호]]의 소감이 실렸다. 다음날 삼천리사에서 이동휘 추도준비회가 조직되어 각 신문사, 사상단체, 교회 관계 인사들이 기독청년회관에서 연합추도회를 추진하고, [[윤치호]]가 일제 당국과 절충을 시도했으나 허가를 얻지 못했다. 이동휘와 인연이 깊었던 강화도의 친지들이 유경근을 중심으로 추도회를 가지려 했으나 역시 일제 당국이 불허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의 유해는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블라디보스토크]] 페르바야 레치카(Первая Речка)에 안장되었으나, 현재는 주변 환경의 변화로 어디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2007년 1월 31일 [[국립서울현충원]]에 이동휘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세워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