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동휘 (문단 편집) === 기독교 입교 및 애국계몽운동 === 군무에서 물러난 이동휘는 강화 지방 전도사 김우제의 설교를 받아들여 [[감리회]]에 입교했다. 그의 [[기독교]]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이었는데 그가 [[을사조약]] 체결 후 발표한 <유고(遺告)>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재되었다. >“기독교가 아니면 상애지심(相愛之心)이 없고, 기독교가 아니면 애국지심(愛國之心)이 없으며, 기독교가 아니면 독립지심(獨立之心)이 없다. 자수자강(自修自強)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충군애국(忠君愛國)의 기초가 기독교에 있으며, 독립단합(獨立團合)기초가 기독교에 있다.” 이동휘는 [[미국인]] 선교사 D.A. 벙커와 박능일이 운영하던 사숙 잠무의숙(岑茂義熟)을 기반으로 1903년 11월 강화도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인 합일학교(合一學校)를 설립했다. 그 뒤 주민들을 상대로 기독교 포교 활동을 벌였고 그를 존경하던 강화 주민들 중 상당수가 기꺼이 기독교에 입교했다. 이동휘는 1904년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한 뒤 이곳을 구국 인재 양성을 위한 모범 학교로 발전시키려 했다. 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학생들을 인솔해 [[덕수궁]]으로 가서 고종을 알현하고 교명과 함께 [[왕실]] 보조금을 얻었으며 적석사(積石寺) 소유 [[토지]]와 농지를 보창학교 운영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중국]] 고전, [[한글]], [[일본어]], [[영어]], 산수, 한국 [[역사]], 한국 [[지리]], 기초 [[과학]], [[웅변]]술 등을 가르쳤으며 매일 1시간씩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감리회 선교사 W. B 스크랜튼의 보고에 따르면 이동휘의 학교 설립 운동으로 1907년 6월 당시 강화도에는 14개 학교에 8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었으며 이동휘의 보창학교를 본따 강화 각 면에 '보창학교'들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이동휘는 [[개성시|개성]]에도 [[김기하]], [[공서학]] 등과 상의해 보창학교를 설립했으며 뒤이어 [[황해도]] 금천, 장단, 풍덕, 안악과 [[충청북도]]의 [[청주시|청주]], [[함경남도]]의 [[함흥시|함흥]]에도 보창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면서 교육 계몽 운동을 벌였고 이로 인해 강화 일대에 72개 학교가 세워졌고 전국에는 170개 학교가 세워졌다. 이동휘는 기독교를 서양 문물의 전달자, 계몽 운동의 수단, 구국 운동의 방법으로 인식하였고 주로 서북 일대를 중심으로 기독교를 통한 민족계몽운동에 주력했다. 그는 [[이종호(독립운동가)|이종호]]와 함께 대표적인 교육가로 손꼽혔고 보창학교는 이종호가 설립한 보성학교(普成學校), 이준이 설립한 보광학교(普光學校)와 함께 “교육의 삼보(三寶)”라고 불렸다. 이 무렵 이동휘는 대한자강회에 가입한 뒤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 삼남 일대를 순회했으며 강화도에도 대한자강회 지부를 설치하고 부회장을 맡아 강화도 주민에 대한 계몽과 [[여론]] 형성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1906년 6월 상동청년학원이 주관하던 순한글 월간 잡지 <가뎡잡지>의 통신원으로서 강화와 개성지국장을 맡아 활약했다. 1906년 10월 13일 이동휘는 이준이 주도하던 국민교육회에 가입했으며 1906년 10월 28일 이준, 오상규, 유진호, 설태희 등과 함께 한북학회(漢北學會)를 조직하고 평의원을 맡은 뒤 속성사범들과 학생들을 모집하러 지방 순회를 다녔다. 이어 1907년 초부터 [[김광제]], [[서상돈]], 이준, 이도재, 양기탁, [[장지연]], [[박은식]]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양기탁, 안창호 등과 함께 국채보상연합회의소(國債報償聯合會義所)의 총무로 활동했다. 그는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에도 관여하여 함경도 총감 겸 최고위원을 맡았으며 1908년 1월 3일 한북학회를 서우학회와 합병시켜 서북학회를 창립했는데 서북학회의 부설학교로서 서북협성학교의 설립이 결정되었고 이종호가 교장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함경도 지역 담당자로 이동휘와 이종호, 황해도 지역은 노백린과 [[이달원]], 평안도 지역은 이갑과 [[유동열]]이 선정되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 당하자 의병을 조직하여 봉기를 당행하기로 작정하였으나 1907년 8월 13일 [[헤이그 특사]] 사건 모의 참여와 강화도 군민 봉기의 배후 선동 혐의로 지목되어 경시청에 체포되었다. 이후 4개월만에 석방된 그는 자신의 장기 구금으로 인해 침체된 강화와 개성의 보창학교 재건에 나섰다. 우선 개성으로 가서 교육총회를 개최하고 지방 유지들과 함께 찬무회(贊務會)를 조직해 보창학교의 재정 확보책을 마련했다. 이어 1908년 2월 강화도로 가서 2월 18일 개학식을 거행했고 학부형들과 지방 유지들을 모아 학무회(學務會)를 조직해 의무 교육의 긴급함과 신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강화도 16개면 114동을 56구역으로 나누어 보창학교 지교 21개와 진명, 계명, 창화, 공화의 4개교 외에 31개교를 증설해 강화도 전역에 걸쳐 아동의 의무 교육 실시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4월 15일 강화도 내에 100여 개 학교들이 보창학교에서 학생 2천 6백여 명과 외국인 손님, 도민 등 3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연합대운동회가 대성황리에 개최되었다. <공립신보(共立新報)> 1908년 6월 17일자 기사에 따르면 운동회는 마치 전쟁 연습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전투적이었다고 한다. 이동휘는 자신이 부재할 때 보창학교를 운영할 이로 [[고성근]]을 선정했으며 이어 함경도 일대의 교육 부진을 개탄하고 이 지역에서의 학교 설립에 나섰다. 1908년 8월 서북학회는 함경도 지역의 교육 진흥과 지회⋅지교 설립을 위하여 이동휘를 함경도 모금위원으로 파견하였다. 이후 1909년 5월까지에 이르는 10개월 동안 이동휘는 함경도 전 지역을 순행⋅연설하며 서북학회의 지회와 학교설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동휘는 지방 유지들을 자극하여 학교들을 설립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노력으로 함경도 각지에 수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1909년 5월 말 한성으로 귀환한 그는 이어 평양, 의주, 순천 등 평안도 일대의 교육 시찰에 나섰다. 그가 들르는 지방의 연도에는 각 학교 학생과 남녀노소가 다퉈서 그를 환영했다. 특히 6월 22일 평양 서북학회가 주최하고 6~7천 명의 청중이 참여한 평양 만수대 송림에서의 대강연에서 당대의 명연설가인 [[윤치호]]⋅[[안창호]]와 함께 참석하여 “오늘의 평양”이란 주제의 연설을 해 청중을 크게 감동시켰다. 6월 23일 3천여 명이 참석한 평양의 대성학교 하기 방학식장에서 전덕기⋅[[최병헌]]과 함께 교육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였고 6월 30일 순천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남녀 학생 4백여 명이 나와서 그를 열렬히 환영하는 가운데 “금일지교육(今日之敎育)”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박한영은 이러한 그의 활동에 대해 <서북학회월보>에 기고한 '경고관북일로(警告關北一路)'에서 당시에 “그(이동휘)의 말 한 마듸에 학교 하나가 되어지고 그의 눈물 한 고치에 학교 하나가 되엇섯다”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서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