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릉대전 (문단 편집) === 종언과 후속 조치 === 이렇게 촉군을 추격하며 후방의 모든 진지들을 지워나가던 오군을 피해서 산길을 택한 유비는 간신히 백제성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 일부 역참의 관료가 유비의 뒤를 막기 위해 스스로 꽹과리와 투구를 져다가 태워서 후방의 추격을 끊어버린 후에야 겨우 백제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유비는 이릉에 도착한 후 사천성 봉절현에서 동쪽으로 7km 지점에 있는 백제성까지 직통으로 연결하였는데 연도에 역마점을 두어 잘 연결되도록 하였다. 유비가 도망할 때 오의 군사가 뒤를 쫓아왔는데, 이때 다행히 이 많은 역점에서 일을 맡았던 관리인이 유비군이 버리고 간 갑옷 등을 모아서 좁은 길에 모아두고 불을 질러서 추격군의 추격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상 국역 [[자치통감]]에 달려 있는 주석.][* 오서 손환전, 촉서 선주전] 222년 6월 이후, 8월 이전. 패퇴한 유비는 오군의 추격을 피해 간신히 영안에 도달하였다. 본래 영안의 명칭은 어복이었는데, 이때 유비가 영안으로 명칭을 고침으로써 영안이라는 지명이 되었다.[* 촉서 선주전, 화양국지 유선주지] 이 당시 유비를 추격한 [[이이]], [[유아]]의 군은 영안의 바로 근처 남산에 이르렀다.[* 촉서 선주전] 조운이 위기에 처한 유비를 구하기 위해 군을 끌고 백제성으로 향했을 만큼 유비 입장에서는 위험천만한 시간이었다.[* 조운전 주석 조운별전] 오군의 내부에서는 백제성에 몰린 유비를 공격할지에 대해 논의가 벌어진다. [[서성]], [[반장(삼국지)|반장]], 송겸은 유비를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육손과 주연, [[낙통]]은 조비의 남하를 예견하며 거절하였다.[* 오서 육손전] 222년 8월. 오군이 촉군을 격파하자 북부에 주둔하다 퇴로가 끊긴 [[황권]]과 [[사합]](史郃)은 결국 위나라에 항복한다.[* 촉서 황권전. 위서 문제기] 한편, 무릉만에 가있던 마량 또한 오계만에서 사망한다.[* 정확한 시점은 파악 불가.] 책임을 돌린 무릉만에게 죽었는지 이릉 이후 유비에게 동조하려 하던 무릉만을 정리하던 보즐군에게 죽었는지는 확실히 알기 어려우며, 정확한 사망 시점 역시 알 길이 없다. 역사학자 Rafe는 이릉대전에서 촉군이 패하는 모습을 본 무릉만이들이 마량을 처형했다고 간주하였는데, 이것은 오나라의 기전에서 마량을 죽인 공과에 대한 서술이 전무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전체 서술은 해당 기전의 중심인물이 거둔 사소한 실패는 가급적 누락하고 공적에 집중하는 특징을 가지는데, 오서에서는 형주에서 상당한 명사였던 마량을 잡은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은 의심할 근거가 된다. 하지만 별도의 사서가 출현하기 전까지 이러한 의심을 확정지을 방법은 없다.] 222년 10월.[* 촉서 선주전] 육손은 손권의 명을 받아 다시 화친을 제의하고, 유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화친이 이뤄지고 이릉대전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신 교환은 12월까지 이뤄졌다.[* 오서 오주전, 건강실록] 이후 [[조비]]가 육손의 예상대로 오나라로 밀고 들어오면서, 오나라 독립의 마지막 분기점인 남정 방어전이 시작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비가 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유비가 육손에게 보낸 편지와 육손의 답신이 육손전에 남아 있다. 대강의 내용은 적이 강릉에 있다며 지원군이 필요하냐고 묻는 유비의 질문과, 당신의 군대는 이미 상했으니 목숨을 보전하고 싶거든 상처를 추스르리라는 육손의 화답으로 구성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