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릉대전 (문단 편집) == 원인 == [[관우]]의 죽음에 대한 '''유비의 분노'''가 가장 큰 이유다. 삼국지를 대표하는 큰 전투가 일어난 이유가 군주의 개인 감정이라니 맥빠진다거나 허망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는데, 촉이 현대 민주제 국가라면 맞는 말이지만 이 나라는 고대 전제군주제 국가다. 전제군주정에서 군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건 전쟁을 일으키기에 아주 충분한 명분이 될 수 있다. [* 고대도 아니고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인인 [[몽테뉴]]도 이런 말을 했다: "황제들의 영혼들과 구두 수선공들의 영혼들은 같은 거푸집에서 만들어진다. ... 우리가 이웃과 말다툼을 벌이는 바로 그 이유가 군주들 사이에서 전쟁을 일으킨다."] 형주공방전이 촉의 형주 상실과 관우의 죽음으로 일단락되자, 여건이 불리하였음에도 유비는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많은 세력을 거치며 속내를 숨기고 실리를 잘 챙겼던 유비는 오랜 전우이자 동업자였던 관우의 죽음만큼은 끝내 참지 못한 것이다. 이는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다른 객관적 사유를 찾지 못했다는 점으로 드러난다. 물론 동맹 측의 배신으로 넓은 영토와 세력의 2인자를 모두 잃었기에 유비 입장에서도 어떠한 군사적 액션 없이 참고만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릉대전은 시기적으로나 투입된 전력의 규모로나 무력 시위가 아닌 총력전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상술했듯이 촉은 전쟁을 일으키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동맹의 배신으로 군주의 측근이자 세력의 2인자인 관우가 목숨을 잃었고, 관우가 맡았던 형주를 잃으며 국토의 상당수를 빼앗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촉서에는 이 원정을 반대한 수많은 신료의 여론이 기록되어 있다. 정사 삼국지 조운전의 주석으로 달린 조운별전, 법정전, 화양국지에서는 다수의 신료들이 반대하였음을 명확히 서술하였으며, 군주인 유비가 이를 무시하였다고 적었다. 촉의 역량과 유비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파악할 수 있던 조운과 제갈량 또한 이 원정을 반대하였다. 타국 또한 촉의 어수선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리라는 예상이 많았다. 황제로 즉위한 조비는 조칙으로 모든 신하들에게 유비가 오나라에 보복전을 펼칠 가능성이 있는지 의견을 구했는데, 당시 위의 신료는 촉의 국력과 형주상실로 인한 타격, 패배를 겪은 국가의 분위기 등 상당히 객관적인 요인을 들어 전쟁이 발발하지 않으리라 예측하였다. 허나 유엽만은 두 가지의 논조로 유비의 원정을 예측하였다. 첫째는 촉이 비록 국토도 좁고 세력도 약하지만 유비는 강인한 인물이므로 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부자 사이나 다름없으므로, 복수를 위해 출병하리라는 것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가장 총애하고 가깝게 대하는 측근인 [[조운]]과 [[제갈량]]의 반대마저 무시하고 원정을 끝까지 강행하는 유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정사 삼국지의 주석으로 달린 조운별전과 화양국지, 정사삼국지 촉서 법정전의 기록과 일치한다. 촉 외부의 기록이 원 출처인 유엽전 등에서도 원정의 주요 목표는 촉의 위신과 함께 관우 개인에 대한 복수로 제시되어, 당대의 인식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