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맹희 (문단 편집) == 왕자의 난과 후계 관련 == [[파일:image_readtop_2016_798357_14792837962683984.jpg|width=100%]] 1988년 12월 13일 장충동 자택. 부친 사후 1년이 지나 인터뷰를 하는 모습. 흔히 일컫는 1969년 삼성판 [[왕자의 난]]은 이병철의 차남 [[이창희(기업인)|이창희]]가 주범인 것으로 알려져있는게 정설이다. 사건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사카린 밀수건]]으로 총대를 메고 감옥을 갔다온 이창희가 자기를 푸대접하는 이병철한테 화가 나 당시 청와대에 삼성 관련 비리를 고발하며 아버지를 처벌해달라는 투서를 보냈고, 당시 청와대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패륜이라며 못본 척 하자, 이를 알게 된 이병철이 이창희를 사실상 호적에서 파버린 사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장남 이맹희도 이창희의 탄원서 투서에 '''협조 혹은 공모를 했다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해당 탄원서를 이맹희와 가까운 청와대 사람들[* 대표적인 인물이 이맹희와 고향 친구이기도 한 [[전두환]]이었다.]이 중간에 만지게 된 것이 밝혀지면서 이맹희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실권을 쥐기 위해 고향 친구인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매개체로 공작을 꾸민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맹희 본인은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부정했고, 실제 당시 전두환, 노태우 등은 어린 나이라 별다른 권력은 없었다.[* 실제 이맹희가 하나회 출신들과 경영권 확보를 시도했던 것은 1980년대 신군부 출범 이후이다. 당시 이맹희와 친했던 경북고 출신 인물 몇이 이맹희에게 삼성을 찾아줘야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병철이 발 빠르게 신현확을 내세워 후계작업을 정리하면서 신군부는 삼성 후계작업에 전혀 관여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이맹희는 회고록에서 젊은 시절 챙겨줬던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나선 자신을 탄압했다며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당시 이들의 리더인 [[윤필용]]이 개입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맹희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공모 혹은 방관설을 정면 반박했는데,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동생인 이창희가 아버지를 내치려는 [[음모]] 시도를 눈치채어 화가 난 나머지 이창희의 벤츠 [[자가용]]을 때려 부수며 크게 혼낸 적이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왕자의 난이 일어나던 무렵 자신은 해외 기업들과의 기술제휴 협상 차 [[해외]] [[출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보니 경영 일선에서 복귀를 시도하던 아버지를 방해하는 듯한 행동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기에 아버지가 그런 의심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사건이 터지던 무렵에도 자신은 [[필립스]]와의 합작 문제로 [[독일]]에 출장 중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청와대 사람들과의 관계와 왕자의 난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사카린 사건 이후 청와대 측과의 관계가 서서히 개선되는 상황이다보니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으나 실상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결정적으로 회고록을 작성하는 시점에서 '''관련 주변인들도 생존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거짓말로 회고록을 쓸 수 있겠냐'''며, '''본인은 맹세코 왕자의 난에 대해 완전 결백함을 맹세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진실이 무엇이건간에, 이병철은 왕자의 난 사건으로 인해 장남인 이맹희까지 한통속으로 의심한 듯하며, 충격이 컸던 이병철로서는 이맹희의 적극적 해명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완전히 떨쳐내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병철이 결혼 문제도 있어 완전히 포기한 듯한 차남과 달리 장남인 이맹희에 대해서는 종종 탄식을 했다는 증언도 있다. 종합해보자면 자식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병철이 경영권과 관련하여 한층 예민해지기 시작한데다, 결정적으로 자존심이 센 이맹희가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버지의 권위에 대항하는 듯한 처신이 문제가 되면서 부자지간의 정에 금이 심하게 가는 바람에 이맹희가 그룹의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멀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에 의해 계열사 임원직에서 대거 해고된 후엔 이병철 회장이 본인이 있던 일본을 들린 적이 있음에도 공항에 마중 나가지 않았고, 이병철 회장이 도쿄지점 직원들과 회식을 하며 지시를 하는데 제동을 걸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이병철 회장은 자신의 권위에 반기를 든 것으로 보고 관계가 더 멀어지게 됐다고 이맹희는 회상했는데, 자식으로서 자존심을 죽이고 아버지에게 숙였으면 후계구도 개선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이맹희 역시 당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멀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76년 후계자로 내정된 삼남 이건희의 경영권 승계에 있어서 장남인 이맹희가 방해가 될까 싶어 [[정신병원]]에 감금(...)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삼성의 이런 움직임을 우연히 알게 된 친구 검사가 귀띔을 해준 덕에 지방 별장에 기거하면서 사냥용 총을 가지고 있다가 자신을 잡으러 온 삼성의 인력들에게 총을 겨누어 위기를 모면했다는 것이다. 물론 진짜 그랬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부자지간에 이런 말들이 나온다는 거 자체가 비극이 아닐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