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병주 (문단 편집) == 일생 == [Youtube(brVY3OAFwBA)] 1985년 12월 17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이병주는 1921년 3월 16일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출생지인 231번지에는 현재 '이병주 문학관'이 있다. 근처에는 이명산이 있으며, 또한 [[섬진강]]가에도 그를 기념하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1927년 북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이후 양보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하여 1933년 졸업하였다. 1936년에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940년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메이지대학]]에 신설된 전문부 문과에 별과생으로 재학했다. 1943년 9월 메이지대학 졸업 후 학병으로 징집되었다가 간부후보생으로 장교까지 해먹었다. ~~본인은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진학했다가 1944년 1월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퇴했다고 밝혔으나 1943년 9월에 졸업하고 바로 징병되어간 이병주에겐 와세다대학에 입학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즉, '''학력위조'''.[* 김윤식, 2015, [[황용주]]의 학병세대 이병주≠황용주]~~[* 인용하신 글은 이병주 학술대회에서 나온 PPT 자료잖아요. 구할 방법이 없는데 원문이 보고 싶습니다. 또한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는 4385명의 학병 전원이 1944년 1월 20일에 입소하였는데 이병주 혼자만 1943년 9월 졸업 후 징병되었다는 근거도 알고 싶습니다. 일본 정부에서 조선인 대학생 징집유예 중지를 공포한게 1943년 9월 30일인데 혹시 PPT 발표자가 이것과 헷갈린게 아닌가 추정됩니다.] [[8.15 광복]] 직후 귀향하였으며,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진주농림중학교 교사를 지냈고 6년 후 [[경남대학교]][* 당시에는 해인대학교였다. 해인대학교는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대학교.]의 교수직을 맡았으며, 재직 기간동안 소설 '내일 없는 그날'을 [[부산일보]]에서 연재했다. 또한 부산에서 [[국제신문]][* 창간될 당시에는 산업신문이었고, 이병주가 활동할 당시에는 국제신보였다.]의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서 활발한 언론활동을 펼쳤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강봉옥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윤종수(1907)|윤종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과 관련된 필화사건으로 인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박정희]]와 친분을 쌓았던지라 2년 7개월만 복역하고 나왔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65년 7월, 감옥에서 구상했던 중편 소설·알렉산드리아를 '세대'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등단했으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이 소설은 시인 신동집(申瞳集)과 문학평론가 이광훈(李光勳)의 권유로 출간된 것이며, 탈전통적이고 새로운 서술 방식으로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의 소설에는 그가 경험했던 시대에 대한 의식, 남성적인 필체 등으로 인기를 끌었다. 이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소설들을 출간했다.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소설 남로당, 그해 5월 등과 같은 소설들을 집필했으며, '마술사', '예낭풍물지', '바람과 구름과 비', '[[행복어사전]]' 등을 발표했다. 마흔네 살이라는 늦은 나이로 등단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27년 동안 한 달 평균 1천여 매를 써내면서 80여 권이 넘는 책들을 출간했다. 마지막에는 건강이 나빠지자 구술을 했다고 한다. 1976년 장편 '낙엽'으로 한국문학작가상을, 1977년 중편 '망명의 늪'으로 한국창작문학상을, 1984년 장편 '비창'으로 한국펜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렇게 왕성한 활동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1992년 4월 3일 향년 71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전두환]]과도 친분이 상당했으며, [[허문도]] 같은 5공 실세와도 인맥이 있었다. 그가 만년에 쓴 수필집에서는 [[전두환]]은 옹호하고 있지만 자기를 감방보낸 [[박정희]]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다. 일본군 장교 출신이 어떻게 대한민국 대통령을 하냐는 논리인데 정작 자신이 간부후보생 출신임은 감추고 학병으로 일방적으로 끌려가 고생만 한 것처럼 위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