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봉창 (문단 편집) == 기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122484492739_20081025.jpg|width=100%]]}}}|||| * 세간에 흔히들 알려진 우측 사진은 합성된 사진이라고 한다.[[https://m.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0810211740285#c2b|#]][* 결의의 순간에서도 활짝 웃는 모습으로 이봉창의 유쾌한 성격이라던지 삶과 죽음을 초월한 비범한 표정이라는 등 미사여구를 덧붙이기 좋은 소잿거리로 종종 쓰이기도 했다.] 의거 전 결의를 다지는 실제 사진은 근엄한 분위기를 내는 중앙 사진이었는데 왼쪽 사진에서 얼굴을 따 오고 펜선을 곁들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잘 보면 턱선이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손과 수류탄도 사진이 아니라 펜으로 그려 넣은 그림이라 자세히 보면 사진이 아니라는 티가 난다. 후방 태극기와 결의문도 펜으로 조악하게 그린 흔적이 보인다. 해방 후 [[1946년]] [[3월]] 출간된 <도왜실기>의 한국어 번역판에 처음 등장한 일종의 삽화인데,[* 원판이었던 [[1932년]] 출간된 중국어판은 중앙의 사진을 사용했다.] 중앙의 사진은 흐릿하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기에 개조를 거친 것으로 추정된다. * 아이러니하게도 원래 일본 사회에 섞여들어가 모범적인 제국신민이 되길 원했던 이봉창이 일본인들로부터 극심한 차별을 받자 [[개과천선]]하여 의거의 길을 택한 과정이 일본의 문화통치의 위선적인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되기도 한다. * '모던보이'적인 생활을 했다고 한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102101032330065002|#]] * 병약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말라리아]]를 앓아 [[관절염]]이 생겨 환절기 때 마다 관절이 아팠다고 하고 [[일본]]에 체류할 당시에도 [[각기병]] 외의 여러 병에 시달렸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구]]와 [[탁구]]같은 운동들을 좋아했다고 하며 하다못해 거사 전에 [[골프]]까지 쳤다고 한다. * 본인 스스로도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육신의 쾌락을 충분히 즐겼다고 자부할 정도로 여자와 [[마작]]과 같은 도박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증거로 아래의 기록이 남아 있다. ||[[다이쇼 시대|다이쇼]] 13년(1924년) 4월 - 계집질과 마작으로 빚을 져서 [[용산역]]의 조차(操車)[* 열차를 편성하거나 다른 선로에 넣거나 나누거나 하는 일]과를 퇴직금을 얻을 목적으로 퇴직함. [[쇼와 시대|쇼와]] 5년([[1930년]]) 3월 - 가명을 '마쓰이 가즈오'로 바꾸고 상경해 [[도쿄도]] 교바시구 미나미오다하라정의 채소절임 가게에 취직한다. 7월에는 도쿄도 혼고구 모리카와정의 모리야 가방 가게로 전직한다. 쇼와 5년(1930년) 12월 - [[중화민국]] [[상하이시|상하이직할시]] 민행로로 망명한다. 영창공사의 축음기 외판원으로서 일한다.|| * 1980년대 중순에 이봉창 의사의 조카가 힘들게 살아갔던 것이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과거 자료에서 이봉창 의사의 부인이 1980년대 중반에 서거했다고 했지만 이봉창 의사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 신문에 실린 인물은 이봉창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형 이범태의 장녀인 조카 이은임 씨임을 말하고 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85061400209208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6-14&officeId=00020&pageNo=8&printNo=19599&publishType=00020|#]] * 비슷한 인물로 [[조명하]]가 있다. 조명하는 [[쇼와 덴노]]의 장인으로서 당시 일본의 국구였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고준 황후]]의 아버지이자 현임 [[나루히토]] 천황의 진외증조할아버지이다.]를 독극물 묻은 칼로 찔러서 죽음에 이르게 했다. 국내가 아닌 타국([[대만]])에서 의거를 일으킨 점도 비슷하다. *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인 배경식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이봉창 의사의 최고 업적이라 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의열 투쟁의 길로 나가게 한 것과 함께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일으키게 한 것이라고 뽑았다.[* 이봉창 의사의 모던보이적 성향에 대한 책을 썼다. 물론 후기에서 몸이 안 좋아져서 엄청 고생했다고 썼지만 말이다.] * 도쿄 [[신주쿠구]]에 있는 요초마치 놀이터 부지가 옛날 이치가야 형무소 자리였는데 놀이터에 사형된 사람들을 기리는 비석(刑死者慰靈塔)이 있다. [[https://goo.gl/maps/D8XAWVzu4Tynx8vH6|#]] 그런데 인근에 쓰레기들이 많다.[[http://news.zum.com/articles/30827369|#]] * 같은 [[한인애국단]] 단원이자 후배격인 [[윤봉길]] 의사와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윤봉길 의사 집안과 연관이 있다. 해방 이후 이봉창 의사가 미혼의 몸으로 순국하고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져 이봉창 의사의 기념사업은커녕 추모제도 제대로 치러지지 않자 윤봉길 의사의 셋째 동생인 윤남의 선생이 빈병을 주워모아 행사 자금을 모으고[* 이봉창 의사 명의로 예금 통장과 [[인감도장]]을 만들고 고물을 팔아 수입이 생기면 거기에 입금해두었다. 당시에는 [[금융실명제]] 이전이라서 이런 일이 가능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썼다. 결국 탄원서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최규하]] 총리에게 지시한 것을 계기로 1975년 처음 추모제를 열었다. 이를 기점으로 기념사업이 겨우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윤봉길 의사 집안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로 이 의사가 역사의 뒤안길로 묻혔을지도 모를 것이다.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idxno=272016|#]] >국군의 병기를 관리하는 책임 장교였던 나의 상식에 의하면, 아무래도 그 거리가 100m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 표적물을 보통 [[수류탄]]을 던져 가지고 실수 없이 명중시키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거듭한 끝에, "약간 구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보통 수류탄 대신에 마미(蔴尾) 수류탄을 구해서 이 동지한테 주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마미 수류탄은 보통 수류탄에 비해서 폭발력이 약하다는 것이 좀 단점이긴 하지만, 그 대신 중량이 가벼워서 멀리까지 던질 수 있는 데다가 불발탄이 없고, 또한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휴대하기가 간편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 수류탄을 [[도쿄]]까지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로 당시 김구 선생과 나는 보통 고심한 것이 아니었다. > [[김홍일(군인)|김홍일]],『대륙의 분노 - 노병의 회상기』, 문조사, 1972, 273쪽 * 이봉창 의사의 의거에 쓰인 수류탄은 [[김홍일(군인)|김홍일]](당시 쓰던 가명은 왕웅)이 만들었다. 이봉창 의사에게 수류탄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도 김홍일이라고 한다. 후에 한국에 돌아와 '''[[중장]]'''까지 지내게 되는 그는 1931년에 [[국민혁명군|중국 국민혁명군]] 소속의 상교(대령)으로, 상하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며 무기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봉창 의사는 2개의 폭탄을 준비했는데 1개는 김홍일을 통해 상하이 병공창에서, 1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한테 보내서 얻어온 것이라고 한다. 1개는 의거용, 다른 하나는 자결용이었다. ||[[파일:external/img11.itiexue.net/13204631.jpg|width=100%]]|| || 마미(麻尾) 수류탄 || * 이봉창 의사는 마미(麻尾)라는 [[수류탄]]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무게가 가벼워 멀리 던질 수 있고 휴대가 간편하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불발탄이 없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폭발력이 다소 약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당시에도 수류탄 기술이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폭발력이 정말 강력한 것을 사용했다면 빗나가고도 천황이 탄 마차까지 동반유폭될 수도 있었다.] 백범 [[김구]]는 훗날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전에 이봉창 의사의 의거 실패를 기억하여 제대로 터지는 폭탄을 부탁했는데 그 하나로 무시무시한 전적을 올렸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이봉창과 윤봉길이 의거에 사용한 폭탄 모두 상하이에 있는 [[중화민국]] 병공창에서 제작한 것이다. 이봉창 의거 당시 창장은 자신들이 건네주었던 폭탄 화력이 미약하여 암살 미수에 그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윤봉길에게는 시험을 거듭한 폭탄을 성심성의껏 제조하여 20여 개를 무료로 제공하였다. 폭탄 제조에 대한 썰은 총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김홍일 중장이 직접 제작했다는 썰이고 다른 하나는 김홍일 중장이 폭탄 제조자 왕바이슈[* [[백범일지]]에서는 송식마라고도 한다.]를 주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홍일 장군이 대만대사로 활동하던 중에 왕바이슈와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이 때 왕바이슈가 이봉창 의사의 폭탄을 제조해 주었다고 하였기에 대체로 김홍일이 중국 병기공창 주임으로 있을 동안 왕바이슈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김구의 요청에 따라 왕바이슈와 김구를 이어 주면서 폭탄 제조에 필요한 화약을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독립운동]]의 특성상 기록을 남길 수가 없어 거의 모든 독립운동 관련 기록이나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의 기억에 의존하기 때문에 위 썰도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심지어 [[고려공산당]]을 통해 [[러시아 내전]]에 썼던 수류탄을 수십발 얻어왔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 그의 생가가 있던 금양초 부근의 이봉창기념관과 효창공원의 거리는 걸어서 넉넉하게 10분에서 15분정도 걸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