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전국시대) (문단 편집) ===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후에 진왕 영정은 [[시황제]]라 선포하였다. 이사는 시황제의 명으로 각종 [[개혁]] 정책에 참여하여 주도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봉건제]]가 아닌 [[군현제]] 실시와 [[도량형]] 통일, 문자를 [[전서#s-2|소전체]]로 통일시킨 것이었다.][* [[분서갱유]] 중에 [[분서]]를 주도한 것도 이사다.] 이렇게 [[시황제]]를 위한 책략을 많이 내고, [[중앙집권제|중앙집권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시켜 준 덕분에 말년에는 그 스스로가 진나라의 최대 기득권자가 되었고,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걸 보면 애초에 진나라의 기득권 세력과 싸운 것도 자신이 그 위치로 올라가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수도 함양 안을 오갈 때 황제에 버금가는 무리를 이끌고 행차해 진시황이 경계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그 경계 대상이 이사가 아닌 승상이었는데 그 승상이 누군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사일 가능성은 존재.] 그의 딸과 아들은 진나라 황족과 결혼했고 이사의 장남 [[이유#s-3.1]]도 큰 세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결국 시초가 잘못되면 끝까지 문제가 발생하듯이 젊었을 때는 기득권 세력과 맞서던 이사도 결국 기득권 세력이 되어 [[간신]] [[조고]]와 작당하여 황태자 [[부소]]에게 갈 [[사구정변|유언장을 조작하는 병크를 터트린다.]] 애초에 제대로 된 진나라 충신이었다면 조고와 같은 간신배와 결탁하지 않았겠지만 스스로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사기(역사책)|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정식으로 소개하고 있는 설이다. 그러나 진시황의 사후를 처리하는 과정이 워낙 비밀스러운 황실의 비밀이었는데, 100여 년 정도 후의 사마천이 세세하게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진시황의 측근과 사마천의 측근들 사이에서 구설되었다는 설이 있다. 나아가서 학자 공원국은 이사가 몰락한 후 고문당하면서 있는대로 이런 이야기들을 떠들어댔을 거라고 추측한다.] 물론 《[[사기(역사책)|사기]]》에 기록된 이 작당의 과정을 보면, 이사가 처음부터 시황제의 유언을 조작할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조고가 후사로 호해를 세울 것을 권하니, 이사는 처음에 "이는 감히 신하들이 논의할 일이 아니다"라며 거절한다. 그러나 조고는 진나라가 전통적으로 [[레임덕|왕이 바뀌면 선왕을 모신 재상들이 대부분 권세를 잃고 야인이 되거나 심하면 목숨까지 잃어왔던]] 경향을 내세워[* [[상앙]], [[장의]], [[범수(전국시대)|범수]], [[여불위]] 등. 타국까지 확대하면 [[오운|오자서]]나 [[오기(전국시대)|오기]], [[악의(전국시대)|악의]]까지 해당된다.] 이사를 협박했고, 이 협박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 덕에 진나라는 [[이세황제|호해]]라는 희대의 [[암군]]이 즉위하였고, [[진승·오광의 난|나라가 막장이 되자]] 이사는 호해에게 간언을 시도했으나 쇠 귀에 경 읽기. 이런 사례만 보아도, 조고나 이사 둘 다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유언을 조작했지만 적어도 이사에게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고는 이사의 이런 마음을 간파하고 그를 해치기 위해 흉계를 꾸미게 된다. 신하들이 황제를 알현할 수 있게 자리를 주선하는 자신의 직무를 이용하여 일부러 호해가 한창 여자들과 술마시고 신나게 놀고 있을 때를 골라 이사에게 호해를 대면할 수 있게 해주었고, 철없는 호해는 노는 자리에서 이사가 머리아픈 업무 이야기나 간언을 해대자 짜증을 내면서 이사의 말을 한귀로 흘려버렸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호해는 이사를 불쾌하게 여기게 되었고, 이것을 기회로 권력을 독점하려는 조고는 이사를 이사의 장남이자 삼천군 태수였던 이유가 반란자 [[진승]]의 [[장초#s-2]] 군대가 지나갈 때 막지 않았고, 이사와 진승이 서로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서 감옥에 붙잡아두고 만다. 이사와 같이 평소에 호해한테 간언을 한 우승상 풍거질과 장군 풍겁도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자살했다. 이사는 억울함을 하소연했지만 조고는 애초부터 그를 죽일 생각이었기에 무시하며,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하게 된다. 가혹한 고문에 견디지 못한 이사는 결국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을 인정하고 말았으며, 호해의 명령으로 극형을 선고받아 함양의 시장에서 [[요참형]]에 처해진다. 이사 뿐만 아니라 당시의 반역자 처리규정에 따라 이사의 가족들과 일가 친척(삼족) 역시 끌려나와 모두 참형을 당해서 대가 끊기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앞서 호해가 그의 장남 [[이유#s-3.1]]의 죄를 논하기 위해 그를 잡아오려고 사자를 보냈지만 이미 이유는 [[장한]]이 동아 전투에서 [[항량]]에게 [[패주#s-2]]할 때, [[항우]]와 [[고제(전한)|유방]]의 추격대에 맞서서 싸우다가 전사해 있었다. 이사는 요참형을 당하기 전에 [[오형]]을 당했는데 처형당하기 전에 차남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 너와 함께 다시 한번 누런 [[개]]를 끌고 상채[* 이사의 고향이다.] 동쪽 문으로 나가 [[토끼]] 사냥을 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겠구나!''' 이에 이사와 아들은 소리내어 울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 일화에서 '''동문견(東門犬)''' 또는 '''황견지탄(黃犬之嘆)'''이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돌이킬 수 없는 삶에 대한 회한과 부질없이 권력을 좇아 내달려온 무상한 인생역정에의 자성이 담긴 한탄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재상]] 정도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상황이 여기까지 몰리면 자결하는 것이 당시의 통례였지만, 이사는 자결하지 않고 버티다가 사형을 당했다. 그것은 이사가 진나라의 전국 통일에 워낙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스스로도 그것이 참작되어 사형까지는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사는 감옥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적어 호해한테 올린다. 그러나 조고의 뒷처리에는 자비가 없었고 조고는 오히려 이사의 상소를 중간에서 가로채서 없애버린다. 또한 조고는 이사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작정한터라 자살을 하게 놔둘리가 없었기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나중에 [[전한]]의 [[소하]]가 [[고제(전한)|유방]]에게 의심받아 감옥에 갇혔을 때 신하들에게 유방이 이사를 거론하며 '''"신하란 허물은 자신이 안고, 유익한 것은 군주에게 양보하는 게 미덕이라 들었는데 소하는 전혀 아닌 듯 하다."'''라고 변명하자 왕씨 성의 사람이 소하를 옹호하며 '''"그런 식으로 진시황이 자기 잘못에만 관대하게 굴게 만든 탓에 진나라가 망한 것인데, 그자들에게 대체 본받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사를 거론하며 승상을 의심하시다니 천박한 짓입니다."'''라며 유방을 깠다. 《[[사기(역사책)|사기]]》에는 ''''이사가 죽자 진나라 내부에서는 이제 진나라는 끝났다고 한탄하는 소리가 많았다.' '''고 한다. 아무래도 호해나 조고를 포함한 3명 중에서 그나마 국정을 잘 이끌어갈 능력이 있던 유일한 인재가 [[숙청]]되면서 더 이상 진나라를 보호할 인재가 없음을 한탄한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