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전국시대) (문단 편집) == 평가 == 희대의 [[간신]] [[조고]]와 손을 잡는 실수를 저질러 헌신해온 제국과 자신의 가문까지도 망쳤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나, 사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며 실제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시황제]]의 명으로 각 나라마다 달랐던 [[도량형]]을 하나로 통일시키고, 문자 또한 [[전서#s-2|소전체]]로 통일시켰으며 각종 제도를 신설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군현제]]. 중앙의 황제가 직접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지방을 통제하는 군현제는 진시황이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고 적용한 것은 이사의 업적이다. 통일 이전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으로 군현제가 실시되고는 있었지만 이는 제한적이었고, 무엇보다 진나라 땅에서만 추진되고 있었지만 이것을 드넓은 중국 전체에 강력한 법가 사상과 함께 적용시킨 것은 이사의 업적이다. 그러나 통일 이전의 중국은 주나라의 시스템인 [[봉건제]]가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리잡고 있었기에 군현제는 익숙치 않은, 너무나 시대를 앞서간 정치 시스템이었다. 이런 정치 체계를 만든 것만으로도 중국사에 남을만한 [[명재상]] 취급 받을만 하다.[* '''[[한비자]]'''가 '''[[법가]] 이론의 완성자'''라면 '''이사'''는 '''법가 시행의 완성자'''로 여겨진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항우]]다. 진을 멸망시키고 항우가 그대로 복권시킨 정치 시스템이 [[봉건제]]였고, 이 봉건제는 강력한 중앙권력의 집권의 부재로 이어졌으며, 이것의 결과물이 바로 [[초한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이사의 군현제는 실패한 것인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군국제를 실시한다. 군현제는 중앙정부의 아주 효율적인 정치 시스템이었으나, 1,000년 동안 이어져온 봉건제를 급작스럽게 바꾸는 것은 누구에게나 크나큰 심리적인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현제와 봉건제를 적절히 섞어 놓은 것이 [[군국제]]였다. 그러나 군국제는 일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했다. 왕에 봉해진 공신들이 [[고제(전한)|유방]]이 살아있을 때는 몰라도 유방 사후에는 중앙집권에 분열이 생길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방이 내놓은 방책이 왕에 봉해진 [[공신]]들의 [[토사구팽]]이었다. 그렇게 해서 유방 말년부터 시작해 결국에야 [[무제(전한)|무제]] 때 군현제가 거의 완전히 군국제를 대체하고, 더 나아가 후대 왕조에도 군현제가 시행된다. 이사를 [[한비자]]의 죽음 및 조고와의 결탁과 출세를 위해 조국을 배신한 점 때문에 단순히 비도덕적인 인물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후대 왕조의 통치 수단으로 완벽히 자리잡은 군현제를 가장 처음 전국적으로 시행시킨 점에서 이사가 매우 혁신적인 정치가이자 행정가였음을 잊어버리는 것은 너무나 박하고 편협한 평가다. 거기다 [[한비자]]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현대에는 태자 부소가 아니라 호해를 후계자로 정한 게 시황제라는 자료가 나오기도 했다. 그 밖에도 한비자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데, 해당 의혹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로부터 이기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해당 의혹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에서는 한비자를 죽인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이유였으며 이사의 사심은 없었다고 보고 있다.] 종합적인 평가는, '''법률과 행정 능력은 매우 우수했지만, 정치적 식견이 떨어져 아쉬운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