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선희 (문단 편집) ==== [[서울특별시의회]]의원 시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선희벽보.jpg|width=100%]]}}}|| || 1991년 서울시의회 시의원 선거 당시 선거 벽보 포스터 사진.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dI5KPJ0jjk4)]}}}|| || [[1991년]] 서울시의원 후보 합동유세.[* 0:25부터.] || 1991년 서른이 채 안된 나이에 서울시의회 [[http://blacktv.tistory.com/1151|시의원]] 선거에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어서 정치에 참여한 적이 있다.[* 1991년 6월 20일 치러진 선거는 31년 만에 부활된 지방선거로 기초의원과 광역의원 선거가 별개로 진행되었다. 이선희는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서울시의회 선거에 마포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불우한 이웃과 청소년을 돕고자 했던 좋은 의도와는 달리 출생년도 조작 파문까지 일어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데뷔 후 식을 줄 모르던 이선희의 인기는 이를 계기로 어려움을 맞이했지만, 이선희는 “의정 활동 중에도 음악 활동은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이종찬(1936)|이종찬]] 당시 민주자유당 국회의원과의 개인적 친분 때문이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는 이종찬을 따라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092400329123015&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2-09-24&officeId=00032&pageNo=23&printNo=14533&publishType=00010|9월 24일 민자당을 탈당]]하고 11월 25일 [[새한국당]]에 입당, 새한국당의 대선 후보로 추대된 이종찬을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112600209204001&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2-11-26&officeId=00020&pageNo=4&printNo=22011&publishType=00020|공개 지지]]했다.[* 지지 선언만 한 게 아니라 선거 운동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120600289105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2-12-06&officeId=00028&pageNo=5&printNo=1414&publishType=00010|활발히 참여]]했다.] 그러나 이후 이종찬이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하자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121700209223012&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2-12-17&officeId=00020&pageNo=23&printNo=22032&publishType=00020|반발]]하여 새한국당을 탈당하고 [[민주당(1991년)|민주당]]에 입당, [[김대중]] 후보를 공개 지지했다. 그 뒤로 야당 의원으로 끝까지 활동하다가 1995년 시의원 임기를 끝낸 후에는 [[김대중]]을 따라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이후 약 3개월 간 새정치국민회의 문화예술행정특보위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같은 당의 [[김대중]] 후보를 공개 지지하였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 시기인 2000년에 [[새천년민주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을 지낸 걸 마지막으로 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후일 토크 프로그램에 나와 발언한 바에 의하면 어린 시절 부모님 없이 자란 친구로 인해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청소년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만 활동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정치인으로서의 타이틀을 보유하면 활동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지인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시의원에 출마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시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정치보다는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였고 세비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정치인]]이 세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진정으로 대단한 것이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말은 청산유수이나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자신의 의정 활동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공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데에 가장 훌륭한 증명이다. 정치 입문의 목적이 민생을 살피는 것이 아닌 권력 획득과 부의 축적인 대부분의 정치인 중 국민의 생활을 돌보는 것과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올바른 정치인들도 더러 있는데, 이선희는 자신이 그러한 올바른 정치인 중 하나라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의 팬들을 제외한 대중의 이선희에 대한 비판 중 대부분의 내용은 이때의 의정 활동과 관련한 것이다. 아무래도 정치인 이미지 자체가 안좋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그녀의 정치 활동은 그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않는 편이다.[* 이는 [[이순재]]와 [[최불암]], [[이주일]] 등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으로, 이 중 '이주일 쇼'에도 함께 출연하는 등 이선희를 가장 아꼈던 이주일은 아예 본인이 정치 생활을 흑역사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정치를 떠나며 남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여기]]에는 나보다 더 코미디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떠난다."'''는 마지막 말이 유명하다. 다만 이순재 같은 경우는 정치에 소질이 있어서, 지역구에서 낙선하고도 [[민자당]] 중랑구 지역위원회 위원장을 계속 맡으며 권토중래하고 다음 총선에서 당선되기도 했으며, 정계은퇴를 발표할 때 동료 의원 중 한 명이 정치가 소질에 맞는 것 같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