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수현(배우) (문단 편집) === 1980년대 === ||[[파일:이수현(홍콩)_1980s.jpg|width=500]][br] 이수현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 <공복>|| 1980년대는 이수현이 배우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1981년 쇼브라더스가 제작하고, 이수현이 처음으로 감독한 작품이자 모터사이클 영화인 <단정로>를 내놓는다. 이듬해 왕청(王青), 정칙사(鄭則仕)와 함께 를 연출, 이는 경찰 영화의 물결을 일으킨 시초가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경영난의 문제로 쇼브라더스의 많은 직원들이 퇴직하게 되자 이수현 또한 회사를 떠나 그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이 시기, 영가전영유한공사(永佳影業有限公司, Always Good Film Co., Ltd.)의 대표자인 진훈기(陳勳奇)[* 이수현은 1982년 진훈기가 감독· 주연한 영화 <가인유약>의 마지막 장면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는 이수현을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며 높이 평가하며 영가전영공사에 합류시킨다. 이 회사에서 이수현은 1983년 <마등아문>을 연출했으며, 이듬해에는 본인이 감독, 각본, 주연을 맡은 영화 <공복>을 내놓게 된다.[* <공복>이 이수현의 커리어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다. 1970년대에도 <악패>, <응소명책> 등에서, 80년대 초에는 <집법자>, <마등아문> 등에서 경찰 역을 맡았지만 ‘경찰=이수현’의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1980년대, 특히 <공복> 이후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대본을 9개월간 수정하였으며, 경찰에 대한 그의 지식과 열망, 그리고 기대를 이 영화에 쏟아부었다. 덕분에 그는 <공복>으로 21회 금마장, 4회 금상장의 2관왕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가 과장되었다고 말했으나, 홍콩 경찰들은 영화의 묘사가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였으며, 이 때부터 오랫동안 이수현은 Lee Sir(이 경관님)이라고 불리며 홍콩 경찰의 아이돌이 되었다. 또한 이 영화의 총격전에 사용된 일부는 오우삼(吳宇森)이 <영웅본색>에서 사용했으며, 이 영화의 다큐멘터리적인 모습은 황지강(黃志強)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류맹공복>, <황가반> 등을 통해 경찰 영화 제작이 자신이 갈 길임을 깨닫고, 1987년 그의 두 번째 영화사 만능영업유한공사(萬能影業有限公司, Magnum Films Limited)를 설립하게 된다. 이 회사는 향후 10년 동안 20여 편 이상의 홍콩 경찰 영화를 제작하는데, 그 중에는 [[주성치]]의 데뷔작인 <벽력선봉>, 영화감독 [[박찬욱]]이 본인의 저서에서 극찬한 <중안실록0기>(국내 출시명 ‘폴리스맨2’), 배급사로 참여한 [[오우삼]]의 전설의 명작 [[첩혈쌍웅]] 등이 있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는 이수현의 대표작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앞서 언급한 작품들 외에도 <첩혈쌍웅>의 이수현과 주윤발의 역할이 뒤바뀐 <용호풍운>, 경찰로서의 역할과 가족으로서의 역할 갈등을 보여준 영화 <적담정>(국내 개봉명 ‘폴리스맨’), 장철의 제자들이 총 출동해 만든 장철 감독에의 헌정 영화인 <의담군영>(국내 개봉명 ‘[[흑전사]]’) 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