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 (문단 편집) === 형제, 자녀 === 류성룡은 저서인 《[[징비록]]》의 평가에서, 모두가 이순신 장군을 영웅적이고 위엄 있는 인물이고 장수로 생각하지만, 장수로서 위엄 있는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글을 읽는 단아한 선비 같다고 했다. 가족에 대해 자상한 부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있다. 이순신의 두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각각 4명과 2명의 자식을 남기고 비교적 일찍 죽었는데, 이순신은 이 6명의 조카를 친자식 못지 않게 잘 키워냈다. 특히 정읍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에 이들 조카들을 데려가면 파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조선은 유교 사상 덕에, 기본적으로 세금 = 백성의 부담으로 보고, 최대한 세금을 적게 걷어 필요한 데만 쓰는 식의 굉장한 긴축 재정을 강요받는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행정관이 가솔들을 데려와 먹여 살리는 것은 충분히 탄핵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다. 이른바 남솔(濫率)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가솔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카들이 부모가 모두 죽어 천애고아라 의지할 곳이 나뿐인데, 어찌 두고 가는가? 차라리 파직당할지언정 조카들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눈치 안 보고 조카들을 다 부임지로 데려갔다. 하지만 그가 정읍 현감으로 있는 동안 가족들이 보여준 처신은 정읍 백성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이 조카들의 혼례를 다 치러낸 후에야 자신의 친자식의 혼례를 했을 정도. >'''晨昏戀慟淚凝成血''' >'''조석으로 그립고 애통하여 눈물이 엉겨 피가 되어 흐르거늘''' >'''天胡漠漠不我燭兮''' >'''하늘은 어찌 무심하게도 나를 굽어살피지 않으시던가?''' >'''何不速我死也''' >'''어찌 속히 죽이지 않으시나?''' >---- >정유년 5월 6일(1597년 6월 20일), 《난중일기》, 꿈 속에서 죽은 두 형을 만난 후[* 두 형이 함께 손을 잡고 울면서 "네가 장례도 못 치르고 이 천리 길을 떠나와 있으니 이제 누가 모든 일을 주장하겠느냐. 통곡한들 도리가 있겠느냐"하고 슬퍼했다고 한다. 이순신은 이 다음 문장에 '형님들이 이 먼 곳까지 혼령으로서 따라와 걱정해주셨다'며 두 형을 슬피 그리워했다.] 아들 사랑 또한 지극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셋째 아들 이면이 아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난중일기》는 [[참척|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금을 울리는 애틋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 "새벽 2시쯤 꿈에서 말을 타고 언덕을 달릴 때 말이 실족하여 내가 물에 빠졌다. 그런데 물에는 빠졌으나 쓰러지지는 않았으므로 보니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듯 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 (중략)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했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하고 골육이 진동했다.''' 대충 뜯고 겉을 보니 '통곡'이란 두 글자가 써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가 유독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 것이냐,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느냐. 나는 세상에 살아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함께 죽어 너와 지하에서 지내며 울고 싶으나 네 형, 누나,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이니 참고 연명하겠다만 혼은 죽고 가죽만 남아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 >정유년 10월 14일(1597년 11월 22일) 《난중일기》 >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이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 >정유년 10월 16일(1597년 11월 24일) 《난중일기》 > "새벽나절에 꿈 속에서 고향의 종자 진(辰)이 찾아왔기에 면이 생각나 통곡했다." >(중략) >"한밤에 생각하자니 눈물이 흐르는데, 어찌 다 말하겠는가. 기어이 내 불효함이 예까지 이를 줄 누가 알았으랴.[br]가슴이 찢어지는 듯 하니 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 >정유년 10월 19일(1597년 11월 27일) 《난중일기》 이순신은 이때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울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난중일기》에서는 종 강막지(姜莫只)의 소금 창고에 "숨어서 울었다."고 나와 있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 보면 "공이 이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졌다"라고 하는데, 이순신이 그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물론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과 이면이 자신을 많이 닮아서 유독 귀여워하던 자식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면은 [[명량 해전]] 직후 이뤄진 보복성 침략 때문에 죽었으므로 비록 전투는 이겼으나 자신 때문에 자식이 죽었으니 그 자책감은 이루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셋째 아들 이면에 대해서는 후에 야사가 하나 전해 내려오는데, 죽은 면이 꿈 속에 다시 나타나 울며 "소자를 죽인 자가 근처에 있나이다."하고 사라졌다. 이순신이 꿈에서 깨고는 이상히 여겨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아산에서 전투를 벌였던 일본군 포로들을 끌어와 심문하니 과연 그중에 면을 죽인 자가 있어 즉시 그를 베어버렸다고 한다.[[https://blog.naver.com/szvaxx/222447746302|#]] 그럼에도 공사 구분은 융통성이 없는 수준으로 엄격해서 아무리 상관이나 친인척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35세에 종8품 훈련원 봉사 시절에는 병조 정랑 서익이 원칙에 어긋나는 인사를 지시하자 칼같이 거절했다가[* 병조 정랑은 품계상 정5품이지만, 그 유명한 '이조 전랑' 자리와 비슷하게 무반직 인사권을 가진 핵심보직이었다.(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전랑이라고 지칭하는 것처럼 병조의 정랑과 좌랑도 전랑이라고 지칭한다)] 이듬해 종4품 수군 만호로 재직 중, 병조 정랑이었던 서익이 군기 경차관으로 와서 감찰로 트집을 잡아 파직되기도 했다. 같은 [[덕수 이씨]]였던 율곡 [[이이(조선)|이이]][* 단, 이이와 이순신은 19촌 관계로 당대에도 덕수 이씨라는 가문만 같지 사실상 남남이었다.]가 이순신이 초급 군관 시절 한 번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당시 이율곡은 지금의 행정부 장관에 해당하는 [[이조판서]]로 지낼 무렵이었다(1년 뒤 국방부 장관급인 병조판서가 됨). 당시 이런 장관급이 호의를 보인다면 출세길 열렸다며 튀어가고 현대에도 이런 고위 인사를 등에 업고 각종 청탁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순신은 '''"(율곡께서) 이조 판서로 있으신 동안은 인사권이 있으시니, 저는 만날 수 없습니다."'''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로비' 권고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는데 병조 '''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를 첩으로 주고 싶어 매파를 띄웠으나 단칼에 거절하기도 했다. 이같은 엄격함은 자신의 친인척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이순신의 장남인 이회와 조카 이분, 이완, 이봉[* 이분과 이완은 큰형 희신의 이남, 삼남이고 이봉은 작은 형 요신의 맏이다.]은 전쟁 내내 별다른 무관 관직조차 없이 일개 [[의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조선 시대에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친인척끼리는 같은 임지에서 관직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상피제]]가 있었는데 이를 충실하게 지킨 것이다. [[이완(1579)|이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야 무과에 급제하고 본격적으로 무관의 길을 걸었으며, 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의주성]]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종제 이훈과 함께 전사한다. 서자 이훈과 이신은 무과에 급제했는데 이신은 이괄의 난때 격전지였던 안현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하고, 이훈은 정묘호란때 이완과 함께 의주를 지키다 전사했다. 두 사람 모두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해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정유년에 아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삼남 이면까지 포함하면 다섯 아들 중 4명과 조카 3명이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 전장에서 분골쇄신했다. 집안의 이단아(?) 차남 이예[* 이열, 이울 등 남아있는 이름이 여럿인데 덕수 이씨 세보에는 이예(李䓲)로 적고 있다.]는 순수 문관으로 형조정랑을 역임했으며 사후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덕수 이씨는 이순신 사후 조선 유수의 무반 명가로 자리하는데 무과 합격자 명단인 무과방목에선 79명의 덕수 이씨 합격자가 확인되며 이중 75명이 이순신 사후 나온 합격자다.[[http://people.aks.ac.kr/front/board/person/viewPersonStatus.aks?bbsCode=125&isEQ=false&kristalSearchArea=P&isEQ=false&kristalSearchArea=P|#]] 75명이 적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현존하는 무과방목은 조선시대 실시된 총 무과 횟수의 20%가 채 안 된다. 70명 이상의 합격자를 배출한 가문은 전체 2,513 성관에서 덕수 이씨 포함 77개에 불과하다. 또한 덕수 이씨 세보에 의하면 이순신 아래로 무과에 급제한 인원 수가 267명으로 대폭 늘어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