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의문점 (문단 편집) === 명량해전 직전 국문 및 처우에 대한 논란 === 이순신이 죽을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의금부 기록 등에 이순신을 고문했다는 직접적 내용이 없기도 하거니와, 고문당했다는 기록은 대체로 개인의 기록이나 상소 등에만 등장하는 내용이며 실제로 그 이후 이순신의 행적(고문 끝나고 바로 연회, 도성 잠입, 장거리 승마 이동. 당시 나이 50에 곤장을 맞았다면 죽는 게 정상이다.)을 고려할 때 심각한 고문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곤장이라 하면 연상되는 두꺼운 노는 곤으로서 이시기엔 있다는 기록조차 없었고 맞으면 생명이 위험하다. 따라서 고문을 받았다 해도 강도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탁의 <신구차>에는 이순신이 형신(刑訊)을 받았다고 되어 있으며, 이 형신은 정강이를 때리며 문초하는 것이다. 주리나 압슬, 단근질이 난무하는 사극의 고문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 다만 당시 이미 50에 이른 이순신의 나이를 고려하면 비교적 가벼운 형문으로도 건강에 상당한 지장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초로 죽을 정도의 고문을 묘사한 것은 이광수의 소설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백의종군은 지금으로 치면 직위해제나 보직해임 정도이며 절대 이등병으로 강등시킨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치열한 붕당정치를 펼 정도로 정치감각이 뛰어났던 조선이 호국공신을 죽도록 고문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조선이 개념이 없어 보이는 건 합리의 기준이 당대라는 근본적 한계이거나 조선말기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한편 고문이 심했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실록에서 이순신에 대한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고, 신구차 등 상소에 이미 추궁을 한번 받았는데 다시 한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니 그만하자는 등의 내용이 있는 것을 근거로 주장한다. 이러한 묘사의 근거인 실록의 선조 30년 3월 13일 기사[* 선조실록 권86, 선조 30년 3월 13일 계묘 2번째 기사. 비망기로 우부승지 김홍미(金弘微)에 전교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이 조정을 기망(欺罔)한 것은 임금을 무시한 죄이고, 적을 놓아주어 치지 않은 것은 나라를 저버린 죄이며, 심지어 남의 공을 가로채 남을 무함하기까지 하며 방자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기탄함이 없는 죄이다. 이렇게 허다한 죄상이 있고서는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니 율(律)을 상고하여 죽여야 마땅하다.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라."]를 보면, 선조가 말도 안되는 죄목을 들먹이며,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므로 지금 형벌을 끝까지 시행하여 실정을 캐어내려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대신들에게 하문하는 내용이 나온다. 선조의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정말로 이순신을 죽이고자 하는 살의까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게다가 형신이 그리 가혹한 고문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선조실록만 보더라도 형신을 받아 '장하(杖下)'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7년에는 윤사회가 12차에 걸친 형신 끝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9년에는 형조에서 양인과 천민을 구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형신을 했다가 3명이나 장하에서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11년에는 조보를 인출했다가 적발된 이들이 형신을 받아 운명할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놓아주는 것이 옳다는 간언이 올라가기도 했다. 즉 형신이 가벼운 형벌이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리나 단근질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이순신에게는 분명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각종 매체에서 이순신의 고문 장면은 단순한 형신을 넘어서 지나치게 잔혹하게 묘사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이순신 고문 장면은 역대 한국 사극 고문 장면들 중 가장 잔혹하기로 손에 꼽힐 정도다. 불멸의 이순신 89회에서 10분 동안 고문씬만 나오는데 온몸에 인두를 지지고 주리를 틀고 심지어 매달아 채찍질을 하고 잿물을 붓는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연상케 한다는 기사가 나왔을정도. 이 장면에서 이순신의 온몸은 무지막지한 단근질과 채찍질로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걸레짝이 되어 있었으며 출혈이 심하다 못해 바닥에 피가 고이는 지경이었는데 현대 의학적으로 살아있다는 게 말이 안되는 연출이다. 때문에 수많은 역사 커뮤니티에선 정말 ‘불멸’의 이순신이었던 것이냐며 조롱하기도 했다. 물론 해당 드라마에서 연출된 고문 장면은 조선시대의 국문법과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고 무엇보다도 실현되었다 쳐도 백의종군과 명량해전은 고사하고 고문 도중 사망했어야 정상이기에, 실제 고문 강도가 어느 정도였든 참고할 가치가 전혀 없는 장면이다. 또한 영화《[[명량]]》에서도 작중 초반 고문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여기서도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 단근질을 당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저 상태로 불과 몇 달 후에 절대 열세 속에 전투를 벌이고 심지어 백병전까지 치렀다고 한 영화적 상상력에 경의를... 게다가 여기서는 형조나 의금부에서 제대로 문초하는 그림조차 아니고, 웬 옥사에서 형리 몇이서 죄인을 지지고 있는 모습이어서, 결국 이것도 고증과 상관없이 이순신의 고통만을 연출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