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평가 (문단 편집) == 개요 == >[[사직#s-2|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선조(조선)|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 >《[[난중일기]]》, 을미년(1595년) 5월 29일. 이순신 본인이 스스로 내린 평가[* Extra History 이순신 편에서 고증 자료를 찾는 과정을 다룬 영상에서 제작진이 '난중일기가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자료였다'는 의미로 언급한 "이순신에게 가장 비판적인 사람은 바로 이순신이었다(The person most critical of Admiral Yi was Admiral Yi)."라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자평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유교]] 사회에서는 자신의 공적을 사람들 앞에서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낮추는 것이 기본적인 미덕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처럼 남들에게 보일 일이 없는 자신의 [[일기]]에서까지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이순신]]은 뛰어난 군사 능력[* 당시 [[일본군]]은 [[센고쿠 시대]]를 막 끝내고 [[일본 열도]]를 [[천하통일]]한 상태였기에, 그 시점에서 수많은 실전을 치러온 전사들로 거듭나 있었다. 그런 적들을 상대로 이순신은 조선 수군을 거느리고 개전부터 종전까지 완벽한 승리로 이끌었다.]을 십분 활용하여 초반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고, 계속해서 승전을 거듭한 끝에 [[조선]]을 [[임진왜란|패망의 위기]]에서 구해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전투에서 빛나는 전승을 거두고 단 한 번의 패배는커녕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은 해군 제독은 이순신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육상까지 포함해 세계 역사를 고루 둘러본다고 해도 이처럼 전설적인 '''[[신화]]'''를 이룩해낸 [[명장]]은 [[잔 다르크]] 정도 외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세계의 전사(戰史)에서 일컬어지는 '전장의 신화'를 쓴 명장이 이순신 하나뿐인 것은 아니나[* '전략의 아버지'로 칭송받으며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꾼 [[카르타고]]의 [[명장]]인 [[한니발 바르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끊임없는 의심과 견제를 받으면서 [[이탈리아]], [[달마티아]], [[북아프리카]] 등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서로마 제국의 거의 대부분을 수복한]]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사막 유목집단에 불과했던 [[베두인]]들을 이끌고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두 제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어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동로마 제국]]을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쫒아내 [[중동]]에서 [[이슬람]]의 지배를 확립했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중국 대륙]]에서 [[유럽]]까지 누비며 총 65번의 회전을 경험하고 32개의 나라를 멸망시켰던 [[사준사구]]의 일원 [[수부타이]] 등.]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정복자]]이며, 이들이 이뤄낸 전과의 동기는 현대 기준으로는 좋게 보이지 않는 [[패권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들을 싫어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엄청나게 싫어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조정, 특히 [[선조(조선)|국왕]]의 시기를 받아 심한 견제를 당한 끝에 결국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처분을 받았으며, 적을 맞아 싸우고 있는 상황인 자신 휘하의 군대에게 보급을 잘 해줘야 할 책임이 있는 조정으로부터 오히려 반대로 국정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생필품과 식량 등을 보낼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당했다. 즉,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정부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군대를 보급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오히려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군대가 그 와중에 정부까지 보급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지원과 도움을 받아 전쟁 수행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조정으로부터 발목만 잡히기 일쑤였다. 게다가 조정의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고 몇 년에 걸친 노력 끝에 독자적으로 일구어낸 병력과 물자들이 [[원균]]이라는 무능한 지휘관 탓에 [[칠천량 해전|모조리 사라지고]], 전란 중에 [[난중일기]]를 통해 그토록 애달프게 그리워하던 어머니와 가장 아끼던 [[이면(조선)|막내아들]]까지 모두 잃는 아픔까지 겪었지만, 한 마디 불평 없이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끝까지 싸워 승리를 얻은 만큼, 이순신은 그의 능력뿐만 아니라 성품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에게 단순한 [[명장]]이나 [[구국영웅]]을 넘어선 '''[[성웅]]'''(聖雄)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순신에 대한 존중은 국내에서만 한정된 것이 아니어서, 콧대가 높았던 [[진린]]도 이순신의 인품에 감복하여 나중에는 자신보다 두 살 적은 이순신에게 [[노야]]라는 극존칭을 사용하며 존경하였고 훗날 노량에서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할 정도였다. 심지어 적국이었던 [[일본]]에서도 이순신을 [[무신#武神|무신]](武神)이라 치켜세우며 그를 기리는 [[사당]]까지 있는 실정이고, 특히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가문은 [[한산도 대첩]] 패전일인 [[8월 14일]](음력 7월 8일)에는 하루 식단을 전부 [[미역]]으로 하는 전통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역사 속의 여러 명장들은 전략/전술적으로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나 인격과 성품에서 하자를 드러내 후대에 저평가를 당하는 경우도 적잖은데, 이순신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단 하나의 흠결마저 나온 것이 없다. 오히려 맨 앞의 서문처럼 [[난중일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순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었던 인물이 이순신 본인이었다. 결론적으로 이순신은 그야말로 훌륭한 [[참군인]]의 표상 그 이상인, [[위인|위대한 인물]]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