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평가 (문단 편집) == 무예에 대한 평가 == 지휘 능력과 별개로, 무장으로서 이순신 개인의 무예에 대한 평가. 지금까지 이순신은 수군의 지휘관, 지략을 내세우는 지장 등의 이미지가 강하여 일신의 무예에 대해서는 비교적 주목도가 떨어졌다. 최근에는 낙마로 인해 과거 시험에 한 번 떨어졌단 점이나, 32살에 무과에 합격했다는 점 등이 알려지자 오히려 무예는 뛰어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허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순신의 무예가 척준경, 이성계처럼 동료 장군들도 혀를 내두르는 당대의 맹장 수준은 아니었더라도, 최소한 장군으로서 보통 이상은 했을 것이다. 오히려 보통보단 뛰어났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흔히 이순신의 무예를 저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근거는, 활 50발을 쏘아 42발을 맞추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과, 무과에 32세의 늦은 나이에 급제했고, 무과 성적이 29명 12등으로 중간 수준이었다는 점, 낙마로 처음 친 과거 시험에선 떨어졌단 점, 몸이 아파 고생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자주 나온다는 점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거의 다 반박의 여지가 있다. 일단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한 나이 32세는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었는데, 애초에 '''당시 무과 합격 평균 연령은 34세였다.''' 게다가 29명 중 12등이라는 성적도 어폐가 있는 게, '''최종 선발자 29인 중 12등이란 거지, 무과 응시자 자체는 당연히 훨씬 수가 많았다.''' 후대 정조 시기에 시행한 한 무과의 응시자 수가 약 3만 5천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이순신이 합격한 무과의 응시자도 수 천은 됐을 것이다. 게다가 합격자 29인 중 25인이 현역 군인었다.[* 무과의 정원은 28명이지만 문과와 달리 무과는 합격 정원이 칼같이 지켜지지 않았으며, 실제론 정원보다 많이 뽑는 경우가 많았다.] 문과에서 무과로 전향한 사람이 현역 군인들과 경쟁해서 29명중 12등이면 그런대로 준수한 성적이다. 더군다나 이순신은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별시가 아닌 4년마다 치르는 정식 무과시험인 식년시에 응시했다. 애초에 무과가 무술고시 같은 시험인데 여기서 극소수의 합격자들 사이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이었다고 무예가 별로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당시 조선에서 무과에 합격한 응시자들보다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다.[* 기록을 보면 딱히 무예에 대한 언급이 따로 없는 무장들도 평범하게 적 몇 명을 베어 죽였다던가, 몇 명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들을 꽤 찾아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전근대의 장군들은 현대의 특수부대원처럼 일반적인 병사들보단 평균적으로 개인능력이 뛰어난 게 보통이었다.] 과거 도중 낙마하여 불합격을 한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낙마는 실력이 있더라도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사고라 이를 통해 실력을 판가름하긴 어렵다. 심지어 '''그 이성계조차''' 낙마하여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설령 당시에 기마 실력이 부족했다고 해도 결국 두 번째에 합격했으니 적어도 과거에 합격할 정도의 기마술은 있었다고 봄이 옳다. 애초에 조선시대 무과 시험에서 보는 기마술은 그냥 빨리 달리는 게 아니라 마상 무예는 물론 말을 달리면서 중간에 다른 말로 갈아타거나, 안장 위에서 [[비보잉]]이나 서커스에 가까운 동작을 하는 등 지금으로 치면 거의 묘기 승마였다. 일단 무과에 합격한 시점에선 기마술이 부족하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순신이 자주 아팠음을 근거로 무예가 부족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지만, 이순신이 몸이 아프다는 난중일기의 기록들 대다수는 백의종군 후 두 달간의 투옥과 고문에 의한 후유증 때문이다. 또 거의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당했다는 통념과는 달리, 당시 이순신은 파직 후 단 한차례 심문을 받았을 뿐이며, 풀려난 뒤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시고 나서''' 말을 타고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투옥 및 심문 과정에서 받았을 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심리적인 충격은 적지 않았을 테니 이것이 건강에 영향을 줬을 가능성은 있고, 이전에도 사천 해전 때 입은 총상의 후유증, 업무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인한 잔병치레, 음주로 인한 숙취, 두통 정도는 있었다. 따라서 왜란 시작 이후에는 이순신이 여러 이유로 몸 상태가 안 좋았을 확률은 높지만, 태생이 무예를 익히기 어려운 병약한 체질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만약 그랬다면 무과에 합격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애초에 마냥 병약=무예가 약하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 [[오키타 소지]]처럼 폐병환자지만 최정예 치안조직인 신센구미의 최선봉에 설 수도 있다. [[체 게바라]]는 천식 환자였지만 격오지를 누비며 게릴라전을 이끄는 군사 지도자였다.] 물론 그의 활쏘기 기록인 50발 중 42발 명중은 장병의 2/3가 활을 다룰 수 있을 정도로 활쏘기가 일반적이었던 조선 시대에는 장군이나 전문 군관 같은 정예병들 사이에선 그다지 높은 성적은 아니었다.[* 임진왜란 때보다 약간 후대인 [[부북일기]]의 기록을 보면, 당대 최정예병이었을 함경도 군관들은 50발 중 43발을 맞추면 가장 못 쏘는 축에 들었다. 군관 이시복은 무려 200발을 모두 명중시켰다고 전해진다.[[https://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044&num=120393|#]]][* 오늘날을 기준으론 무척 잘 쏘는 편이다. 5시 1순의 방식으로 쏜다면 적어도 2번은 몰기(모두 명중)를 했다고 볼 수 있는데, 대한궁도협회의 승단 심사기준은 8단이 9순(45시)에 37중, 9단이 39중이다.] 하지만 최정예병들과 비교하면 하위권일지언정 객관적으로 봤을 때 크게 떨어지는 수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당시 이순신은 이미 50대 전후였다. 현대 기준으로는 중년 정도의 나이지만, [[노익장|당시의 평균 수명을 감안하면 무장으로선 적지 않은 나이이다.]] 이를 감안하면 나이를 먹고 실력이 하락했을 가능성도 있다. 당장 '''명궁으로 유명한 [[정조(조선)|정조]] 역시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레 활의 적중률이 하락했다.'''[* 정확하게는 40세 전후 때 가장 적중률이 좋고, 이후 적중률이 떨어졌다고 한다.[[https://www.yna.co.kr/view/AKR20180120051600005|출처]]] 물론 정조는 1년 동안 꾸준히 활쏘기를 수련하는 무관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기준으로 보긴 어려울 수 있지만, 요컨대 사람의 활쏘기 실력이 일평생동안 꼭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다만 위는 어디까지나 50발 중 42발을 맞춘다는 게 이순신의 일반적인 실력이라는 점에서의 가정이다. 이순신이 활을 쐈다는 기록은 수백 개나 있지만 실제 몇 발을 맞췄는가는 42발을 맞췄던 단 하루 외에는 기록하지 않았다.[* 난중일기도 어디까지나 일기인지라, 공문서처럼 모든 게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진 않다.] '''따라서 실제 이순신의 정확한 실력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순신은 [[원균]], 서성(徐渻), 군관 3명 등 여러 사람과 활쏘기 시합을 하여 이기기도 했다.[* 이 중 서성의 경우는 문관이긴 하다.] 이를 고려하면 그의 실력이 원균은 둘째치고 '''적어도 군영의 군관들과 비교했을 때는 딱히 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무관 출신인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활쏘기를 하였는데, 그의 활쏘기가 우습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신랄하고 엄격한 이순신의 성격을 고려하면 정말 객관적으로 평가했을 확률이 높으며, 스스로 활쏘기에 자신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군관이나 무관 등 정예병들 사이에서도 그냥 잘 쏘는 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무예에 관해 주변에서 직접적으로 남긴 기록들이 존재한다.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서는 이순신이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다."'''라고 기록하였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했고 더욱이 글씨도 잘 썼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충무공행록에는 '''"22세 겨울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팔 힘과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이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이 (이순신의)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4242156|출처]]]라고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이순신이 한창 무예를 훈련하던 당시에는 그 실력이 뛰어났음을 짐작 가능하다. 또 이를 고려하면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당시 무장에게 필요한 창술, 검술 등도 당연히 기본 이상은 하였을 확률이 높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무장이라면 원래 활과 함께 창, 칼도 익히는 것이 기본이다. 애초에 활쏘기 자체가 한국에서 워낙 중시되고, 실력을 가늠하기 쉬워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무예를 익혔을 장군들도 그냥 무예 관련 기록은 활쏘기 정도만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고려의 한희유나 이성계, 왜란 당시 조선의 맹장이던 황진이나 이종인 등을 보면, 이들 모두 무예에 대한 기록은 말타기와 활쏘기밖에 없지만 정작 칼이나 창으로 뛰어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물론 왜란 직전 조선은 워낙 평화가 오래 지속되는 등 여러 이유로 시험 등에 직접적으로 평가되고 중시되는 활쏘기에 치중된 면이 있었다. 여러 기록에 창과 칼을 익히지 않아 문제라는 서술이 있을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왜란 당시에 활약한 여러 장수들이 창칼로 활약한 것을 고려하면 FM대로 익힐 사람들은 익혔던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 역시 본인의 칼에 관한 시를 몇 개 남긴 점이나 그 철저한 성격을 고려하면 창검술도 제대로 익혔을 확률이 높다.] 이순신의 용맹이나 무예는 실제 전공에서도 드러난다. 흔히 이순신 하면 원거리에서 화포 등으로 적군을 제압하는 수군 지휘관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이순신은 무과 급제 이후 여진족과 맞닿는 최전방 국경에서도 3년간 복무했었는데, 니탕개의 난때 여진족 수괴인 울지내를 생포하고, [녹둔도 전투]] 같은 야전에서도 활약한 인물이었다. 특히 녹둔도 전투에서 이순신은 '''수십 명에 불과한 병력을 [[이경록]]과 단 둘이 지휘하여 여진족의 1천 기병을 끝내 이겨냈다. 심지어 반격하여 포로 일부를 되찾기도 했다.''' 이는 그의 무예를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다. 100명 이하의 소부대를 지휘해 많은 병력의 적을 깨뜨리려면 이를 1선에서 이끌어야 할 장수 개인의 무예가 꽤 중요하다. [[삼국지]]에서도 [[제갈량]] 같은 인물이 고작 몇십 명이나 몇백 명만 지휘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런 식의 기록은 당대의 맹장인 [[장료]] 같은 장수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인데 이순신에게 이런 기록이 존재한다. 즉, 함경도 군관 시절의 이순신은 개인의 용맹도 꽤 뛰어났거나, 적어도 무장으로서 부족함이 없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순신은 심지어 '''수군에서 총지휘관으로 있을 때도 직접 선봉에 나선 적이 있다.''' 배들 간의 선상 백병전도 이루어질 정도의 격전이던 [[노량해전]]에선 몸소 시석[* 화살과 돌. 적들의 공격을 비유한 것이라 보면 된다.]을 무릎쓰고 힘껏 싸우며 전투를 독려하다가 탄환에 맞았다고 한다.[* 지휘관인 이순신이 이러한 것을 보고 의아해 할 수 있는데, 전근대에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 전투 독려 등를 위해 지휘관급이 몸소 일선에서 싸우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물론 직급이 올라가고 대군을 지휘하기 시작하면 몸을 지키고 지휘에 집중하는 게 일반적이긴 했다. 실제로 노량해전 때 이순신이 몸소 나서자 걱정한 부장들이 만류했다는 류성룡의 기록이 있다.] [[명량해전]]에서도 다른 전선들이 주저하자 이순신의 대장선이 선봉으로 나가 싸운 것은 유명하다. 이렇듯 이순신은 종종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선 [[용장]]의 면모도 갖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감안했을 때, 이순신의 무예가 부족했다는 인식은 여러모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순신이 [[이성계]]나 [[신립]], [[황진]]처럼 당대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무예가 아주 특출난 장수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적어도 무장으로서 평균은 당연히 됐을 것이며, 오히려 평균을 웃도는 무예를 갖추고 있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보는 편이 옳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순신, version=2891)] [[분류:이순신]][[분류:인물에 대한 평가]][[분류:일본의 역사왜곡]]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