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평가 (문단 편집) === [[일본]] 우익의 폄하 === 일본의 연구자들 역시 이순신의 능력과 그가 전쟁에 미친 영향을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 전술했듯이 일본 측에서 이순신을 까내리면 [[자승자박|'''자신들이 까내린 그 이순신에게 먼지나게 털린 일본의 장수들'''은 더더욱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도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 해군사 및 일본 전국사 연구의 대가 중 한 명인 키타지마 만지 교수의 경우 KBS 다큐멘터리에까지 나와서 이순신에 대해 뛰어난 평가를 내릴 정도. 그러나 현실과 달리 인터넷상에서는 우익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왜곡된 문서가 많은 [[일본어 위키백과]] 문서들 중에서도 이순신 관련 문서는 그 왜곡의 범위가 상당히 크며, 특히 사서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문장의 대목만을 짜깁기해 자국의 역사에 유리한 결론을 내기로 악명 높다. 아래는 위키를 제외한 이순신 관련 왜곡사례나 수법들이다. * [[명량 해전]]이나 [[노량 해전]] 등 전과(戰果)의 폄하. 참고로 실제 전과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와 [[이순신/전투 관련]] 문서에 정리되어 있다. * 일본 우익들이 전투에선 졌지만, 전략 목표는 달성했다고 평가하는 명량 해전으로 일본의 서해 진공은 완전히 좌절했으며, 수군력의 약화로 이후 큰 공세를 하지 못하고, 왜성에 의지한 수비전, 교착 상태에 들어간다. * 노량 해전에서는 마치 이순신이 전쟁 범죄라도 저지른 듯이, '''퇴각하는 사람을 잔인하게 추격하다가 역관광 당했다'''는 식으로 써놨으며[* 조선 측은 최고 지휘관인 이순신 및 그 밑의 일부 지휘관 그리고 명군 지휘관 1명이 전사하고 진린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는 등 피해를 안 본건 아니었지만 일본군은 전투에 참여한 함선의 2/3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이순신을 죽인 것이 무색할 정도로 피해를 많이 보았고 시마즈 본인도 대장선이 침몰하는 바람에 물에 빠졌고 조선측의 갈고리에 걸려 죽을 뻔했다. 더욱이 이 때 조선군은 60척이었는데 조선군만 놓고 보면 1:5였고 명군이 합쳐져야지 6:5로 일본의 열세인데 조선의 피해는 뚝 떼놓고 명군으로만 규모와 피해를 집계해서 보면 총 300척 중에 1척이 격침된 게 전부다. 명군의 피해를 놓고 보면 일본군은 명군이나 조선군에게 떡이 되도록 두들겨 맞았을 뿐 역관광을 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다못해 조선 수군을 궤멸시켰다고 쳐도 총 전력손실을 보면 조명 연합군은 전체의 1/6만 타격을 입었을 뿐인데 일본군은 2/3나 박살났다. 아무리 병력 면에서 조명 연합군이 약간 유리했다 하나 아무리 (말이 안 되도록) 최대로 가정해도 1/6이 박살난 조명 연합군과 2/3가 박살난 일본군을 비교해보면 일본군이 역관광시켰다고 주장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조선군이 궤멸당하고 일본군이 전력을 온존하여 승전한 것처럼 써놨다. 참고로 퇴각과 항복은 완전히 다르며, 현대전에서도 __퇴각하는 군대를 공격하는 것은 전쟁범죄가 아니다.__ 애초에 퇴각 자체가 병력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전술적 군사행동''' 중 하나다.[* 예시로 [[전열보병]] 시대의 전투에서 기병이 하는 일이 정찰과 퇴각하는 적에 대한 추격 및 격멸이었다.] 피해 없이 집에 가고 싶으면 이기든가 그 자리에서 항복, 혹은 종전을 위해 협정이라도 했어야 했다. 군대의 퇴각은 민간인의 피난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현대전에서 퇴각하는 군대를 굳이 추격하지 않는 이유는 인도적인 이유가 아니라 매복이나 역습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순신에게 복수하겠다며 해안 마을과 피난하는 민간인들을 어린아이조차 가리지 않고 한 명도 남김없이 학살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행태가 바로 전쟁범죄다. 심지어 이순신 자신조차 일본군의 보복으로 가족들이 위험에 처했고 그 와중에 막내아들 이면이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러니 더더욱 노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을 최대한 많이 몰살시키려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거짓 퇴각하면서 적을 끌어들여 단번에 격파하는 전술도 있으며 그 전술로 승리한 예가 바로 [[한산도 대첩]]이다. * [[시마즈]] 가문은 큐슈를 정벌하려고 했던 도요토미군도 애를 먹었을 정도로 막강한 다이묘였지만, 임진왜란 참전 이후 일본의 대세를 판가름하는 결전인 [[세키가하라 전투]]에 1500명밖에 동원하지 못했다. 정치적인 이유[* 노량 해전 이후 2년 뒤 가중내란이 있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여할 의사 자체도 적었다.]가 주로 거론되나, 노량 해전에서 입은 큰 피해 역시도 주된 이유로 제시된다. * 노량 해전이 '''종전 전'''에 벌어진 엄연한 전투 행위라는 점도 무시하고 있다. 노량 해전은 조명 연합군의 마지막 대공세였던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벌어졌다. 더구나 순천의 왜성을 바다에서 포위하다가 응원군이 오는 것을 차단하면서 벌어졌으므로, 위와 같은 시각은 당시 전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 조선과 일본의 기록들을 자신들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태도 또한 문제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일본 측 사료는 군충장과 진지표, 전황 보고서 등 신뢰도가 높은 1차 사료들을 대단히 많이 보유하고 있다. 수치적인 면에 있어서, 총 참전 인원 십수 명 수준의 전투에서도 보고를 위한 군충장을 작성했던 전국 시대의 특성상, 부대 배치와 병력 현황, 일본군의 병력 흐름 등을 자세하고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일본군 장수들의 가문 기록은 조선의 족보 기록과 비슷하게, 자기 가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공적은 부풀리고 피해는 축소하는 면이 있어서, 완벽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가 [[김유신]]으로, [[삼국사기]]에서 신라만 뚝 떼놓고 보면 허구한 날 고구려에게 얻어터지고 백제에게 얻어터지는데 김유신 열전을 보면 진김유신무쌍을 찍는다. 이는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 김유신 가문에서 지은 행장을 참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한 나라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서로 다른 나라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행장과 실제 역사가 차이가 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있지도 않았던 명군에 대한 승리가 언급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조선인들이 남긴 기록과 마찬가지로 당대인이 남긴 1차 사료라서 섣불리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기록의 신뢰도만 따지면 조선 측 역시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원균을 배설보다 낫게 서술하여 개인 감정만 드러낸 《난중잡록》. 신뢰도가 높은 강항의 기록도 그의 처지상 풍문이 상당수 섞여 있고, 교차검증 시 틀린 부분이 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조선 측 기록, 일본 측의 행정 문서와 교차검증을 통해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추론해낼 수 있다. * 문제는 이들이 조선과 일본의 자료들을 적당히 입맛에 맞게 추려내고 해석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이다. 프로파간다는 적당한 사실이 배합됨으로써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는 점을 떠올려 보자. * 일본 수구 세력이 '''자학사관(自虐史觀)'''을 극복하고, 학생들에게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정통성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새 역사 교과서에서는 일부러 이순신을 뺐다. 기존 대부분의 일본 역사 교과서에는 이순신의 초상까지 실려 있었다. * 일본어 위키백과 등지에서는 충무공의 동상이 군사 정권의 권력과 힘의 상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원문> 韓国ソウルの官庁街である世宗路には、李舜臣の銅像が建てられている。これは軍事政権下の力の象徴として設置されたと言われる。なお、外にも釜山龍頭山公園や木浦など、数多くの朝鮮半島南海岸に李舜臣の銅像が建てられている。한국 서울의 관청가인 세종로에는 이순신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군사 정권의 힘의 상징으로 설치되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더불어, 그 외에도 부산 용두산 공원이나 목포 등, 다수의 조선반도 남해안에는 이순신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실제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세종로와 태평로가 뻥 뚫려있기 때문에 남쪽, 일본의 기운이 강하게 올라와 이를 제어해야 한다는 풍수지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진 동상이다. 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 사항은 "일제 시대 때 변형된 조선 왕조의 도로 중심축을 변형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대신 세종로 네거리에 '''[[이순신|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였다고 한다. 목적이 실제 일본의 기를 억누르기 위한 것은 분명하나, 군사 정권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었으며 실제 이순신 장군 동상 및 몇몇 애국선열상의 철거가 거론된 적이 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