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탄불 (문단 편집) === [[로마 제국]]의 [[수도(행정구역)|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anchor(콘스탄티노폴리스)] ===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사두정치]] 시절 서방 부제의 자리에 있었을 때부터 150여 년간의 위기로 쇠락할 대로 쇠락하였으며 [[로마 신화|전통적인 다신교]] 문화와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공화주의적 정치 관례]]가 남아 있던 [[로마]]를 대체할 제2의 수도의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 조건은 [[이집트]]나 [[소아시아]] 등의 경제적 중심지와 문화적 중심지인 [[그리스]]를 포함하는 제국의 동방과 가까운 곳이며 당시 제국을 위협하던 가장 큰 세력인 [[다뉴브 강]] 이북의 이민족 및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국경과 가까워 이들의 침입 시 신속한 대응이 가능한 곳이었다. 본디 그는 새로운 [[수도(행정구역)|수도]]를 건설할 자리로 모이시아 속주의 세르디카(Serdica)[* 지금의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도시)|소피아]].]를 생각하고 있었고 "세르디카는 짐의 로마가 될 것"이라는 말 또한 여러 번 언급했으나[* 세르디카 외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키워놓은 동방 정제의 수도 [[니코메디아]], 사두정치 시절 동방 부제의 수도 시르미움(현재 [[세르비아]]의 스렘스카 미트로비차(Sremska Mitrovica)), 훗날 제국 제2의 도시가 되는 [[테살로니키|테살로니카]] 또한 고려 대상이었다.] 사두정치를 끝내기 위한 [[리키니우스]]와의 내전 도중 벌인 비잔티움 공성전을 통해 비잔티움이 자신의 이상을 구현할 최적의 장소라는 곳을 깨닫게 되었다. 324년 [[사두정의 내전|내전]]을 종결짓고 [[로마 제국|제국]] 유일의 [[로마 황제|황제]] 자리에 오르자마자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선포하였고 곧바로 비잔티움을 제국의 수도에 걸맞은 도시로 바꾸는 대공사에 착수했다. 이후 이 도시는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Κωνσταντινούπολις)'''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일단 이름은 이렇게 붙었지만, 도시가 동로마 제국을 넘어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유명한 도시가 되면서 점차 '도시 중의 여왕(바실리스 톤 폴레온/Βασιλὶς τῶν πόλεων)', 이걸 넘어서 더 흔하게는 그냥 '''그 도시'''(이 폴리/ η Πόλη / The [[시티|City]])라고 불렀다.[*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 명칭은 제국에 도시는 오직 콘스탄티노폴리스뿐이라는 의미가 아니며, 다른 지방을 시골 취급하는 것도 아니다. 특정 도시를 The City라고 칭하는 건 구약성경에서도 현대 영어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인데, 가령 [[영국 영어]]에서 The City라고 하면 런던 일부 지역을 일컫는다. 유일한 도시가 아니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The) 도시([[시티|City]])"라는 의미이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명칭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하여야 본 의미에 가깝다.] 그 뜻을 생각하면 나중에 나오는 터키어 명칭 '이스탄불'과도 상통하는 명칭이다. 일단 도시가 삼각형의 양변이 [[보스포루스 해협]]에 면해 있기에 육지의 한 변만 방어하면 되는 천혜의 요지이다. 게다가 당대 어떠한 공성 병기로도 뚫을 수 없다는 [[테오도시우스 성벽|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의 위엄은 대단했다. 도시를 노리고 쳐들어 온 수많은 이민족들은 이 성벽을 넘지 못했다. 4차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에게 함락당한 적이 있지만, 십자군은 성벽을 뚫고 들어온 게 아니라, 금각만(골든 혼)을 건너 들어왔다. 게다가 삼각형의 양변이 접한 바다가 단순히 외딴 곳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그리고 에게해를 위시한 지중해 본해와 흑해를 잇는(폭이 좁아서 경우에 따라서는 봉쇄할 수도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이다 보니 전시가 아닌 평시 상황에서는 [[지정학]]적인 이점을 살려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가 될 수도 있는 땅이다. 한편, 이탈리아의 로마가 수도이던 그 이전 시절의 흑해는 그저 제국의 동북쪽 구석에 있는 내해 정도였던데 반해(다만 아테네 시절에도 우크라이나의 곡물은 지중해의 주 상품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이 수도가 된 이후에는 흑해의 중요성이 훨씬 높아졌다고도 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z616578.vo.msecnd.net/6360794513233694721004192386_greco-romain-constantinople-vue-generale-1.jpg|width=100%]]}}} || 콘스탄티누스 사후 [[로마 제국|제국]]이 콘스탄티누스의 자식들 및 조카들에 의해 나뉘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제국 동방, 즉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맡게 되었다. 중세 서양 세계의 강대국 중 하나였던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만큼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들 중 하나였으며[* 이와 비견할 만한 도시는 [[후우마이야 왕조]]의 [[코르도바(스페인)|코르도바]],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 [[당나라|당]]의 [[시안(도시)|장안]], [[북송]]의 [[카이펑]] 등이 있었다.] 특히 제국이 경제적으로 절정기에 달했던 [[콤니노스 왕조]] [[마누일 1세]]의 치세에는 총 인구 40만여 명 중 외국인 인구가 6만에서 8만에 달했을 정도로[* J. Phillips, The Fourth Crusade and the Sack of Constantinople, 144.]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로서 번영했다. 이 무렵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비하면 옛 수도인 로마는 너무나 몰락해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민들로부터 보잘 것 없고 다 망해버린 촌구석 동네 쯤으로 여겨져 멸시를 받았다. 한 예로 968년 [[동로마]]에 파견된 [[신성 로마 제국]]의 사신인 리우트프란트와 만난 동로마의 환관인 크리스토포루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이탈리아의 로마에는 온통 사악한 노예나 빵장수들만 남았소."라고 말했다. 고대 [[서양]]에서는 빵집 주인이나 혹은 빵을 파는 빵장수를 가리켜 [[도둑]]이나 사기꾼이라는 나쁜 이미지가 있었다. 고대 서양에서는 마을마다 주민들이 가져오는 밀가루를 반죽하고 구워서 빵으로 만들어 파는 빵집이 하나씩 있었는데, 빵집 주인들 중에서는 주민들로부터 받은 밀가루 중 일부를 몰래 빼돌려서 숨겨놓고 밀가루 상인들한테 팔아넘기는 식으로 돈을 버는 악덕 업자들도 많았다. 그런 이유로 고대 서양에서 상대방을 비난할 때 빵집 주인이나 혹은 빵장수라는 말을 썼다. 즉,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겼는데, 그 이후로 로마는 쭉 쇠락하여 빵장수 같은 사기꾼들만 남는 범죄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 크리스토포루스가 했던 조롱이었다.[[http://todayhumor.com/?bestofbest_434976|#]] 그러나 1204년 도시를 침략해 온 [[4차 십자군]]에 의해 3일 동안 도시 전역이 약탈당하고 그들이 세운 괴뢰국, [[라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고 1261년, [[니케아 제국]]이 도시를 탈환하고 제국을 재건했으나 도시는 이미 활기를 잃은 지 오래, 그 뒤로 제국이 점차 쇠락하면서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에 도시 인구는 겨우 4만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1453년, 도시를 새로운 수도로 삼고 제국을 꿈꾼 [[오스만 술탄국]]의 [[메흐메트 2세]]에 의해 끝내 함락된다. 자세한 내용은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서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