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탄불 (문단 편집) ===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스탄불 터키 2.jpg|width=100%]]}}}|| ||<:>{{{-1 '''이스탄불 신시가지의 야경'''}}} || [[1922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수도의 지위는 상실하고, [[아타튀르크]]를 수반으로 하는 신생 튀르키예 정부는 오스만 왕가와 귀족들을 반역자로 규정하여 모두 추방했고 오스만 시절의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아나톨리아 땅의 튀르크계 발원지와 같은 척박한 땅 [[앙카라]]로 천도하였다. 이때 도시의 정식 명칭은 코스탄티니예에서 이스탄불(Istanbul)로 바뀌었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한때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그리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1923년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 협정]] 당시에 이스탄불 전체 인구의 1/3이 그리스인인 현실을 고려해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은 '''추방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박해는 아타튀르크 사후 특히 1950년대 들어 [[키프로스]] 문제와 관련해 그리스와의 갈등이 심해지자 가속화되었으며 이 시기 튀르키예 정부의 묵인 속에 이루어진 시민들의 조직적인 약탈과 폭행까지 행해져 1960년대를 기준으로 인구는 급감하게 된다. 1955년은 아직 영국 식민지였던 [[키프로스]]에서 키프로스는 그리스라며 그리스와 통합을 요구하는 시위와 폭력 행위가 극에 달해 있을 시절이다. 아테네에서도 반 튀르키예 시위가 있었고, 특히 이스탄불과 마찬가지로 로잔 조약을 통해 추방에서 제외된 트라키아 서부 지방의 튀르크계 주민들에게도 박해가 벌어졌다. 그러자 튀르키예에서도 반 그리스 여론이 치솟기 시작했고, 그게 폭력 사태로까지 번졌다. 1930-40년대까지만 해도 튀르키예와 그리스 관계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동구권의 공산화로 인해 잔뜩 긴장한 양측 정부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둘 다 제정신은 아니었다. 또 오스만 제국이 소멸되고 나서 오스만 제국 국적이 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을 튀르키예 공화국으로 신청하지 않은 그리스계 무국적자들이 이스탄불에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이들은 외국인도 아니고 자국인도 아닌 상태로 거주 허가증만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이때의 키프로스의 반 튀르크 시위 이후 법적 이유를 들어 하나 둘 추방했다.[* 영화 "터치 오브 스파이스"의 주인공 가족들도 엄마와 외할아버지는 튀르키예 국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스탄불에서 계속 살아도 되지만, 주인공의 아버지인 사바스 야코비디스가 무국적자라 합법적으로 추방되는 모습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당시 튀르키예 정보기관 요원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추방하지 않겠다고 꼬시지만, 아버지는 5초 동안 망설이다 결국 거부하고 그리스행을 택한다. 하지만 이스탄불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아버지의 마음을 흔들고, "세상에서 가장 긴 5초였다."라고 말한다.][* 일본의 조선적과 비슷한 경우다.] 백여 년이 지난 2015년 현재는 거주민의 겨우 0.01%만이 그리스계이다. 이들은 정교회를 믿는 인구만 한정한 것으로 마찬가지로 그리스 혈통이지만 19세기 말과 [[튀르키예 독립전쟁]] 시기 그리스에서 추방된 무슬림인 기리틀리(Giritli)의 수는 훨씬 더 많으며, 오스만 제국 시절에 튀르크화된 그리스계 인구는 여전히 이스탄불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실 튀르키예에서 종교가 아닌 혈통으로 '그리스계'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튀르키예의 영토인 아나톨리아 반도, 그중에서도 인구가 밀집된 해안의 평야 지대에는 고대부터 많은 그리스계 도시들이 건설되어 있었고, 로마 제국 시대에는 제국 내에서도 인구수로 상당히 두드러지는 속주였다. 이후 동로마의 쇠락으로 [[튀르크인]]들이 이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기는 하였으나 당연히 기존의 주민들(대체로 그리스계로 여겨지던 그리스어 사용자들)에 비하면 소수였기에 문화적 동화와 통혼을 통해 융합되면서 현재의 '튀르키예인' 개념이 탄생한 것이다. 혈통적인 그리스계를 따지자면 현재 튀르키예인의 상당수가 튀르크인 도래 이전부터 현지에 터 잡고 살던 그리스인들로 혈통이 이어진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는 튀르키예의 산업화와 더불어 이스탄불의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비록 수도는 앙카라로 이전했지만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남아 있던 인프라는 어디 안 가고 남아 있었고, 비록 그리스인들이 추방되었다지만 정작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엘리트 계급으로 군림하던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유력 가문들은 대부분 그대로 남았고, 지리적으로 유럽과 인접하여 이스탄불 위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스탄불 하면 오늘날 관광 중심지인 구 성벽 내와 갈라타, 위스퀴다르, 카드쾨이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 전까진 논밭이나 임야지였던 곳에 시골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난개발]]이 시작되었다. 물론 정부도 가만히 있진 않아서 단속도 했지만, 이들은 [[공무원]]들이 죄다 퇴근한 밤중에 건물을 지었고, '밤에 지어진 집'이라는 뜻의 게제콘두(Gecekondu)가 여기저기 들어서자 정부도 하는 수 없이 수도와 전기를 공급해주었다. 우리나라 개발독재 시절에야 그냥 국유지 무단 점유로 다 구속하고 불도저로 죄다 밀어버렸겠지만 이슬람 관념상 집없는 사람을 내쫓긴 좀 그래서 일단 지어진 집들은 인가를 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밤중에 몰래몰래 날림으로 지은 달동네가 멀쩡할 리는 없었고, 지진이나 각종 사고로 피해를 많이 겪었다. 한때 이스탄불 내 주택의 무려 65%가 무허가 게제콘두였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제대로 된 주택이나 아파트로 개선된 상태이다. 하지만 이미 개발된 부지에 대한 전면 재개발은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게제콘두 시절 형성된 비좁고 구불구불한 도로도 개선되지 못하고 남아 있어 이스탄불의 악명 높은 교통 정체의 원인이 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