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승만 (문단 편집) == 어록 == >'''공산주의는 [[콜레라]][* 당시 표현으로는 호열랄(虎烈刺). 헌데 언젠가부터 한자 발음이 와전되어 호열자라고도 불렸다.]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같이 살 수 없다.'''[* 출처: 로버트 T. 올리버의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투쟁』] >---- >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 >'''이젠 천하 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다.''' >---- >1901년 4월 19일자 [[제국신문]] 논설 中 >'''선원들이 술에 취해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눈이 멀고 팔이 부러져서 배를 움직일수록 위태롭게 만들어 물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데 이 배의 선객들은 구조하는 일을 남에게 미뤄두고 무심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하겠는가. 선객들은 남이 건져주기를 바라지 말고 선원들에게 버려두지도 말고 각자 자기 일로 생각하고 자기 힘을 다해야 한다. 우리 대한 삼천리 강산은 곧 2천만 생명을 싣고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이 몰아치는 큰 바다를 외로이 나가는 배와 같다. 우리는 지금 당장 물에 빠져가는 배 안에 앉아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보아야 한다.''' >---- > 저서 <[[독립정신]]> 中[* 조선이라는 나라를 [[선박|배]]에, 지배층을 선원에, 백성들을 선객에 비유하며 무기력하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백성들이 자기 일이라는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깨어날 것을 외치고 있다.] >'''대한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이란 두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인민들의 마음속에 독립하려는 마음을 넣어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제일가는 일이다.''' >---- >저서 <독립정신> 中 >'''사람을 두 가지 부류로 구별할 수 있으니 하나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다.''' >---- >저서 <독립정신> 中 >'''전국을 통틀어 [[양반]]은 1000분의 1도 못된다. 나머지 999는 모두 그 양반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실로 나라에서는 1000분의 999는 다 잃어버리고 앉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저서 <독립정신> 中[* 조선인들의 마음을 결박하고 있는 것 중 하나로 여전히 양반과 상놈의 구분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양반은 조상이 이름났다는 이유로 능력이 없어도 자리를 차지하고 비천한 출신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상놈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니 수많은 잠재적 인재들이 썪고 있음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지금 이 시대에 노예의 풍속을 가진 나라는 대한과 청국밖에 없다. 슬프다, 대한의 형제들이여. 어찌하여 옛 법에 익숙하여 내 나라 내 동포를 소나 말 같이 대접하며 짐승처럼 사고파는가. 미국 사람들은 저들과 생김새가 다른 흑인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 동포끼리 전쟁까지 벌이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이 나라는 동포를 노예로 부림을 당연하게 여겨 노예법을 여태껏 폐지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 >저서 <독립정신> 中 >'''우리는 우리 집 종들이나 남의 집 하인배들, 낮고 천하게 여기는 부인과 여자들,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어린아이들을 다 한층 올려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사람의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고 사람에게 속한 물건으로만 알던 모든 악습을 버리고, 국법과 올바른 도리 앞에서 그들을 모두 동등한 사람으로 대접하여 따로 서서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국민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 >저서 <독립정신> 中[* 이는 이승만 정부가 20세 이상 국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를 실시하면서 실현된다.] >'''모든 정치제도의 성패는 항상 그 나라 백성들의 수준에 달려있다. 굽어 자란 나뭇가지는 갑자기 펴지 못하고, 앉아서만 자란 아이는 하루에 멀리 가지 못한다.''' >---- >저서 <독립정신> 中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권리만 주장하고 공공의 이익을 등한시한다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것이 오히려 권리를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 >저서 <독립정신> 中 >'''[[교육]]을 하는 근본 목적은 사람이 가진 지혜와 본성을 거울처럼 맑게 닭아 세상만사를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추게 하여 잘잘못과 우열을 가리게 하려는 것이다.''' >---- >저서 <독립정신> 中[* 이승만은 교육을 중시한 사람답게 부족한 인건비 예산 중 교사의 봉급을 늘 1순위로 지급했다. 이로 인해 경찰이나 군인의 비리가 횡행하는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선진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를 모두 배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배우는 데 그치지 말고 실행하고 옮겨야 한다. 남들이 흉보고 욕하는 것을 상관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야 한다. 형식적으로 하는 체해서는 소용이 없다. 모범을 보이는 사람은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 > 저서 <독립정신> 中 >'''진실로 만국이 서로 통하여 한 집 같이 섞여 살며 형제같이 사랑하여 정의가 친밀하면 [[세계화|풍속이 스스로 같아지고 인물, 언어, 문자까지도 다 한결같이 될 것]]이다. 그렇게 지난 100년 동안에 세상이 변해 온 것을 보면 오는 100년에도 또 어떻게 변할지 짐작할 수 있다.''' >---- > 저서 <독립정신> 中 >'''구구절절이 더없이 적실하여 장부의 혈기를 격동시키는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모든 사람은 다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니, 이 한 구절로 말미암아 모든 조목의 근본이 생겼다. 사람마다 나도 남과 같은 권리가 있음을 깨닫고, 그 권리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 결과 이렇듯이 보배로운 기초를 세우게 된 것이다.''' >---- > 저서 <독립정신> 中 >'''조물주는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권리를 주셨으므로 생명과 자유의 안락한 복을 추구하는 것은 다 남이 빼앗을 수 없는 권리이다. 한 사람이나 한 나라가 자기가 제 일을 하는 것을 자주라 이르며, 따로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은 것을 독립이라 이르는데, 이는 인류로 태어난 자에게 부여된 천품으로서 인간이라면 모두 다 같이 타고난 것이다.''' >---- > 저서 <독립정신> 中 >'''공산주의는 실패한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이유 때문이다.''' > >'''1. 재산을 나누면 근로의욕이 꺾인다.[br]2. 기업가를 없애면 혁신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소련이 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2번이다. 나머지 1, 3, 4, 5번은 소련도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느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들이지만, 2번은 공산주의 자체의 근본적 결함이기에 도저히 수정하거나 보완할 수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오시프 스탈린/평가#s-2.2|이 문단]] 참조. 이승만은 소련이 탄생한 직후부터 이미 소련이 가진 근본적 문제점을 통찰한 셈이다. 1950년대 식민지가 해체되며 탄생한 수많은 신생독립국들이 공산주의를 국가 정책 이념으로 채택하는 와중에도 자본주의에 기반한 혼합경제체제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자본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기에 가능했다.] [br]3. 지식인을 없애면 모든 사람이 우매해진다.[br]4. 종교를 없애면 도덕이 타락한다.[br]5. 소련을 조국으로 믿으면 배반당한다.''' >---- >1923년 태평양잡지 '공산당의 당부당' 中 >'''PACIFISTS ARE LIKE [[제5열|FIFTH COLUMISTS]]''' >---- >'''평화주의자들은 간첩과 같다.''' >---- > 저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中[* 이 책이 쓰여진 1941년 당시는 이미 [[중일전쟁]]과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정세가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평화주의를 배격하자는 [[에리히 루덴도르프|전쟁광]]적 발언이 아니다!''' 이미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 외치는 평화주의는 적국에 이익을 가져다 줄 뿐 진정한 평화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다. 일본 내막기를 읽어보면 당시 평화주의자라는 자들이 얼마나 대책없는 자들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승만은 그들의 그러한 태도를 비판한 것이지 평화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조지 오웰]] 역시 같은 시기에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한 쪽의 전쟁 수행을 방해하는건 다른 쪽의 전쟁 수행을 돕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이를 그대로 읽으면 평화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것 같지만 이 발언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것은 이미 평화와의 저울질이 끝나고 결단이 내려진 상태를 의미하기에 평화주의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이승만은 알았던 것이다.] >'''One who believes in the democratic principles of government is essentially an individualist. The power of the government is derived from his citizenship. Therefore, his personal rights and personal freedom are the fundamental basis upon which the structure of the nation is built. Different from totalitarian ideology, which holds that the people should obey the government, a democracy, on the other hand, insists that the people's rights should be protected against any possibility of the government's usurpation.''' >---- >'''민주주의적 정부 원리를 신봉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자다. 정부의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그 위에 한 국가의 구조가 세워지는 기반이 된다. 국민은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체주의]] 이념과 달리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권리가 정부에 의한 그 어떤 침해의 가능성으로부터도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 저서 中 >'''It has been my task to present the case of Korea as an example to show that she is a victimthe firstof Japan's lust for power. Her destiny cannot be separated from that of the free peoples of the world, nor from the lot of those peoples who once knew freedom and have lost it for a while. At long lastperhaps sooner than we dare to hopethe democratic forces of the world will thrust the Japanese back on their islands, and peace will reign again in the Pacific. In that day Korea will rejoin the ranks of the free and again become known as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 >'''한국이야말로 일본의 야욕에 바쳐진 첫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조명하는 것은 나의 오래된 숙업이었다. 한국의 운명은 세계의 자유인들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고, 한 때 자유를 누렸지만 지금 자유를 상실한 자들의 운명과도 분리될 수 없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어쩌면 우리의 바램보다 일찍, 전 세계의 민주주의 진영이 일본을 패망시켜 섬 안으로 밀어넣을 것이고, 태평양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 날이 오면 한국은 자유 국가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고, 다시금 [[고요한 아침의 나라|고요한 아침의 땅]]으로 알려지게 되리라.''' >---- > 저서 中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파하며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의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천 3백만 동포여!''' >---- >1942년 6월 13일, VOA 단파방송연설 中 >오늘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함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 >[[https://db.history.go.kr/id/dh_001_1945_10_21_0010 | 매일신보 1945년 10월 26일]] >'''이론상으로 [[공산주의]]는 그럴듯하다.''' 만일 이 주의를 전달하려는 사람들이 단순히 이 주의를 주의대로 전하면 나도 그들을 존경할 것이다. 만일 이 주의가 [[민주주의]]와 같이 세계 대중에 복리를 줄 만한 주의가 된다면 아무도 막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자들이 아름다운 이상으로서 양의 가죽을 만들어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야심자를 덮어 씌워 공산주의를 [[소련]]의 앞잡이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 사람들에게 각각 정부를 파괴시키고 나라를 [[크레믈린]]의 독재하에 넣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당신의 동생일지라도 공산주의의 훈련을 과학적으로 받은 뒤에는 당신의 동생이 아니다. 그 [[매국노|동생]]은 따라서 소련을 자기의 [[조국(동음이의어)#s-2|조국]]이라고 부르고 국가 공업을 파괴하며, 당신의 정부를 뒤엎고 당신의 동포를 넘겨 준다. 그러면 드디어는 당신의 나라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엔 당신의 동생은 집없는 거지가 되고, 가족은 노예가 되며, '''그 뒤에는 이것을 깨달아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 >1946년 2월, 6주간의 민정 시찰을 위해 지방을 순회하며 돌면서[*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219-220] >'''민주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 등 자유를 극력 보호하는 것입니다.''' >----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 >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 연설 中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1950년 10월 [[평양 탈환]] 후 연설 中[*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창궐 이후로는 이 말을 패러디해 역으로 '''"뭉치면 죽고 [[사회적 거리두기|흩어지면 산다]]"'''로 패러디되기도 한다. 2009년 1박 2일 혹한기 특집에서 재발굴된 이후 꾸준히 유행어는 아니어도 쓰인 문장이었다.] >'''조금만 더 견디면 전쟁이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전후 복구와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고급 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하다. 그 때를 위해 대학 재학생들을 보존시켜야 한다.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 >1951년 2월 18일 대학생 징집연기조치 시행 >'''배신을 일삼는 일인들은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미국을 정복하고자 하였소. 그러나 미국은 일본의 경제 구조를 엄청난 규모로 구축해 주었고, 그래서 일부 아시아 국가의 국민들 중에는 일본만큼 대단한 지원을 받으려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할 수밖에 없다고 농담을 할 정도라오.''' >---- > 대일 미국 원조와 일본경제의 급속한 부흥에 대해 분개하며 남긴 1951년 4월 25일자 메모 >'''전쟁이 끝나면 하루빨리 부흥 사업을 펼쳐야 할 것이니 그 기초가 되는 [[철강]] 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 특히 주택 건설 사업을 위한 함석, 철판 등의 공급을 담당할 제강 사업 건설 계획을 우선적으로 강력히 추진하라. 미국이 돈을 못 내겠다면 정부가 보유한 자체 보유 달러로 공장을 지으라.''' >---- >1953년 4월 4일 내각에 특별 지시[* 다만 미국에서 철강 산업에 태클을 건 데다가 보유 기술도 없던 국면이라 전쟁 후에 철강 산업을 진행하지는 못 했다.] >'''내가 [[덕종(당)|당 덕종]]이야?'''[* 출처: 장택상, <대한민국 건국과 나>, 91쪽] >---- >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7일, 대전으로 피란을 온 국회의원들이 대국민 사과문 발표를 결의하고, 이를 [[장택상]]과 [[신익희]], [[조봉암]] 등 의원들이 전달하자 이승만이 한 대답. >'''내가 [[덕종(당)|당나라 덕종]]마냥 덕이 없어서 이런 고초를 겪게 했다고 말하란 말이냐? 나는 사과 못한다. 사과하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해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9.28 서울 수복|미군과 국군이 서울을 다시 탈환하자,]] 이승만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은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의 민심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이승만에게 서울 시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권유를 하자, 이승만이 버럭 화를 내면서 내뱉은 말로 알려져있다. 당시 서울을 점거한 북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 색출을 한다면서 무려 55만 915명을 검거하고 [[https://www.police.go.kr/user/bbs/BD_selectBbs.do?q_bbsCode=1050&q_bbscttSn=1B000016420878000|#]] 그들 중에서 800명을 사형시킨 일이 너무 지나친 처사라는 비판 여론이 일자 이승만은 사형시키지 않은 시민들을 모두 풀어주었고, 결국 [[이기붕]]이 이승만을 대신해서 '''"서울 시민 여러분들께 죄송합니다"''' 라고 공개 사과문을 발표해야만 했다.]''' >---- > 내무부치안국, "한국경찰사", 1973, 제2권 제2편 제7장, 547쪽 >'''제너럴 원, 자네는 지금 [[공산주의|공산]] [[북한]]으로의 귀환을 반대하는 애국 청년들을 [[포로]]라고 생각하나? 그들은 모두 우리의 [[동포]]요, 애국하는 청년들이야, 그들을 구해야 해.''' >---- > [[반공포로 석방 사건|반공포로를 석방]]하기 직전, [[원용덕]] [[헌병]] 사령관을 불러 자신의 의도를 내비치면서[*a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342-344] >'''나는 내 신분의 권한으로서 전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명령하였다. 나는 이 조치를 단행함에 있어서 [[유엔군사령부|유엔군]] 당국 및 관계 당국과 전연 협의 없이 진행한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제네바 협정]] 및 [[인권]] 옹호의 제원칙하에 반공 포로들은 석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 포로 석방 직후 자기 심정을 토로하면서[*a] >'''저 모습이 얼마나 자유스럽고 평화스럽습니까? 나는 반공 포로를 [[북한|공산 지옥]]으로 보내느냐, [[대한민국|광명의 이땅]]에 머무르게 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근 일주일 동안 [[기도]]한 끝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번 조처를 감행한 것입니다.''' >---- > [[아이젠하워]] 특사로 파견된 로버트슨 [[미국 국무부|미 국무성]] [[차관보]]가 [[휴전]]을 설득하러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창 밖의 [[경무대]] 숲을 날고 있는 '''[[까치]]''' 한 쌍을 가리키며[*a]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 >'''당분간 공산압제 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우리들의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요,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는 계속 남아있으며 결국 성수되고야 말 것입니다.''' >---- >1953년 7월 6.25 전쟁 정전협정 직후의 성명[* <38선은 없어졌다. 휴전 결사반대. 38선 대신 압록강을 달라. 38선 대신 두만강을 달라.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여러개 구호를 번갈아 들면서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몇 달 동안 데모를 해야 했다. 이때 학생들만이 아니라 전국민이 결사적인 데모를 하였다.] >'''[[대한민국|우리]]는 앞으로 [[베이비붐 세대|여]][[X세대|러]] [[밀레니얼 세대|세]][[Z세대|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주한미군|많은]] [[선진국|혜택]]을 받게 될 것이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약]]은 앞으로 [[한강의 기적|우리를 번영케 할 것입니다.]]''' >---- >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후[* 이는 이승만의 업적 중 단연 1위에 손꼽히는 전설적인 외교적 성과다. 2020년대에도 이 조약의 실용성은 대단한 수준이며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현재와 달리 '''당시 미국은 극빈국이었던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돈이면 차라리 일본에 투자하는게 훨씬 효과적일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때 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미국이 약속한 [[타이완 관계법|단순한]] [[남베트남|군사적]]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지원]]에 만족했다면 신생 독립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안보 불안에서 비롯한 과도한 군비로 인해 성장 동력을 잃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중진국]] 수준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정말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선진국|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이 조약은 앞으로도 우리를 번영케 할 것이라는 이승만의 발언은 완벽히 들어맞았고 성공한 예언이 되었다.] >'''언제까지 미국이 사다주는 [[비료]]에 의존하고 살아야 하는가.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자금으로 공장을 건설하고 기술자를 양성해서 필요한 물자를 국내에서 생산해야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 내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 측과 상의하여 반드시 비료 공장을 지어라.''' >---- >비료 공장 건설안을 거부한 미국에 대해 >'''내가 산에 올라가 나무 한 토막이라도 베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고 공포했지만 소용이 없어요. 당장 땔감 없어 밥도 못 지어먹을 형편인 국민들에게 나무를 베지 말라고 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말이오. 다른 땔감을 만들어주고 산에 올라가지 말라고 해야 국가의 영이 제대로 서는 것이지, 지금 우리가 [[석탄]] 열심히 캐서 연료를 공급해야 사람들이 나무를 베지 않을 것이오. 내가 어떻게 하든 식량은 미국에서 끌어다 댈 테니 당신은 땔감 문제를 책임지시오. 우리 힘을 합쳐 나라를 살려봅시다. 내 눈에 서울시내에 장작 실은 마차가 다니는 모습이 안 보이게 해 주시오.''' >---- >1957년경 정인욱 강원탄광 사장을 대한석탄공사 총재로 임명하며[* 대체 연료의 공급 없이 [[녹화사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석탄과 도시가스 공급 없이는 나무를 베어 연료를 충당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자연재해 빈발로 이어져 경제 성장 동력을 크게 저하한다. 현대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이 겪는 문제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 >[[4.19]] 시위 소식을 듣고 직접 병원을 찾아가 다친 학생들을 위문하며[* 출처: [[김정렬(1917)|김정렬]] 국방장관의 회고록 "항공의 경종"][* 이승만은 역설적이게도 본인이 열심히 보급한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의해 하야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어떻게 하야하게 됐는지 아는 사람이 이 어록을 보면 마치 자기자신과 싸우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3.15 부정선거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본인이 부정선거를 획책한 건 아니었다. 당시 이승만은 이미 대선 승리가 보장되었기에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사망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면 정권이 바뀔 수 있었기에 자유당 인사들이 이승만 몰래 부정선거를 획책한 것이다. 이승만도 혁명 1주일 전에야 국무회의에서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고 선거에 대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가 있기 전인 2월 13일 정부통령 선거 직전 '긴급담화'(일명 2.13 담화)를 발표해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나, 당시 최인규(당시 내무부장관)가 법정에서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으로 다가왔었다고 고백한(학민사편집부 편, <혁명재판>, 학민사, p39) 것을 보면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를 직접적으로 지휘하지 않았다 한들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자유당 간부들을 비롯해 제1공화국 내각 인사들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압박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으리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 >1960년 4월 26일 대통령 하야 성명에서 >'''나는 위로받을 필요가 없다. 불의에 궐기한 백만 학도가 있고 정신이 살아있는 국민이 있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나라의 미래는 밝다.''' >---- > 4.19로 하야 후, 망명 전 이화장에서 머무를 때 대만 장제스 총통이 보낸 위로편지에 대한 답장 中[*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시절에도 그랬지만 외교에 집중하는 국정운영 스타일로 인해 내치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를 지적하며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 평한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동아일보 기사가 일품. 이를 옹호하자면 식민정책으로 인해 교육의 기회가 적어 고졸이 엘리트로 취급받았던 때에 독립하자마자 전쟁까지 겪고 북한군이 사회인사나 학자를 [[납북|납치]]해가는 바람에 인재가 부족했던 것이 원인이다. 게다가 독립 당시 한국에는 박사 학위자가 5명(...)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반 이상이 [[월북]]해 버렸다. 아무튼 이로 인해 임기 내내 [[이승만/부정적 평가|국내 문제]]에 시달렸고, 급기야 [[자유당(1951년)|여당]]의 과잉충성과 여기서 비롯한 [[3.15 부정 선거|부정선거]]를 예방하지 못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 말년에 이승만 스스로가 "내가 4.19 혁명 때 '그렇다고 합니다'란 말만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자조한 것은 자기 스스로가 국정에 있어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음을 자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엄연히 제1공화국의 수반으로서 자유당 정권의 중심이었던 이기붕의 폭주를 막지 못했으니 부정선거를 예방할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다. '불의에 궐기한 백만 학도', '정신이 살아있는 국민'을 이야기한 이 발언은 [[유체이탈 화법]]이 아니라 자신의 직무유기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 행사를 치하하고 감사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으며,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자행한 게 아니라 예방하지 못한 것임을 증명한다.]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 >유언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 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 버겁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 >서거 직전 마지막 기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