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승철 (문단 편집) == 경력 == [[부활(밴드)|부활]]의 2대 보컬이자 1집 보컬로 데뷔. [[부활(밴드)|부활]]의 1대 보컬이었던 [[김종서(가수)|김종서]]가 [[부활(밴드)|부활]]로 활동한 지 6개월도 되지 않아 탈퇴하게 되자[* 부활의 전신인 디 엔드에서 활발하게 공연활동을 했지만 부활 1집 앨범이 나오기 전에 탈퇴했기 때문에 이승철이 부활의 1대 보컬인줄 아는 사람들도 꽤 많다. 탈퇴한 이유는 매니저와의 불화 때문이라고. 다만 김태원이 김종서가 시나위로 잘된 이후에 라면 박스 들고 부활 숙소 놀러오기도 했다는 거 보면 멤버들과의 불화는 없었던 듯 하다. 실제로 부활을 떠나고 잘됐는데 질투 같은 건 없었냐는 질문에 부활보단 시나위의 음악과 더 잘어울려서 여러모로 잘됐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김태원(음악인)|김태원]]은 부활 공연을 팬이자 스텝 겸으로 따라다니던 아는 동생 이승철에게 새 리드보컬을 구해야하니 좀 도와달라고 했는데, 이승철은 본인이 보컬로 [[부활(밴드)|부활]]에 들어가고 싶다고 강력하게 어필을 했다.[* 찾아봤는데 자신만큼 노래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승철에게 노래를 시켰는데 생각보다 잘 했고[* 이승철이 김태원에게 처음 인정받은 노래가 [[딥 퍼플]]의 Soldier of Fortune이라고 알려져있는데, 사실 처음 부른 노래는 [[송골매(밴드)|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라고 한다. 2003년에 부활 8집 발매 이후 가진 콘서트 영상에서 김태원과 이승철이 Soldier of Fortune을 부르면서 앞에 멘트를 통해 이 곡을 처음 부른 것처럼 말하기는 한다. 이 라이브의 멘트 때문에 Soldier of Fortune이 오디션 첫곡인 것처럼 알려진 듯. 공연 멘트를 재밌게 하려다보니 이런 멘트가 나온 듯하다.] 몇 차례 객원보컬 형식으로 쓴 후 정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승철의 홈피에 가보면 자신이 김종서의 후임으로 임명된 것은 어머니의 돈줄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적어놨으며, [[해피투게더(KBS)|해피투게더]]에 출연해서는 처음에는 거절당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어머니에게 1년 연봉만큼의 돈을 빌려서 음악 장비를 준비했더니 받아주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다만 그 당시 밴드는 투자 같은 걸 해주던 소속사 없이 마음이 맞는 멤버끼리 뭉쳐서 시작하는 방식이 대다수였으므로 각자의 돈으로 본인의 장비를 준비해서 공연을 다니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같은 맥락으로 이승철도 보컬로 참여하려면 본인의 마이크와 스피커를 준비해야 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매니저의 회고록에 따르면 총 40여만 원의 장비를 구입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 교사의 한달 월급도 안되는 돈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김태원(음악인)|김태원]]과 이승철의 수십년에 걸친 애증관계가 형성된다. 그리고 데뷔 때부터 부활은 [[양홍섭]] 작사/작곡의 '''[[희야(노래)|희야]]'''와 김태원 작사/작곡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로 메가히트를 치게 되고, 당시 최고의 대중성을 지닌 [[록밴드]]로 떠올랐다. 다만 밴드의 특성상, 다른 멤버에 비해 이승철이 얻는 관심이 90%에 달했다. 어느 정도냐면 부활하고 [[김태원(음악인)|김태원]]은 몰라도 이승철만 아는 사람이 수두룩할 정도로, 예능에 [[김태원(음악인)|김태원]]이 나왔을 때도 '''이승철이 밴드에 들었었냐'''라는 말을 들었다. 한마디로 밴드 부활이 아닌 이승철의 밴드였다는 말. 당시 이승철은 귀공자처럼 너무나 잘생긴 외모덕에 여성팬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노래 외에도 각종 TV/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수준급의 입담을 과시하며 아이돌급 인기를 누렸다. 이승철에게 오는 팬레터와 선물이 어마어마 했다고 한다.[* 이 상황에 대해서 김태원은 질투는 하지 않았다고 본인 유튜브 채널에서 증언했다. 다만 한 명에게 인기가 몰리는 것이 밴드 관점에서 좋지 않았다는 첨언도 덧붙였고 부활 해체 이후에 '더 게임'이 이승철을 겨냥한 작명이었다고 하는걸로 보아, 그 당시에는 어느 정도 경계를 했던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몇년 지나 [[김태원(음악인)|김태원]]이 마약 복용으로 인해 교도소에 가고, 이승철이 팀을 떠나면서 부활은 허무하게 해체된다.[* 1987년 2집 발매 이후 활동 도중 김태원이 교도소에 들어갔고, 팀 활동이 불가능해지며 해체를 선택했다.] 해체 당시 상황은 김태원과 이승철의 증언이 약간 엇갈린다. 김태원은 이승철이 떠난 것에 무게를 두는 반면 이승철은 매니저의 CF 출연료 착복을 원인으로 보고 있다. 다만 해체 당시에 상호 간 합의가 있었으며, 합의 내용 중에 부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부분은 김태원과 이승철이 대체로 동일하게 회고하고 있다.[* 이는 이후 당시 매니저였던 백강기씨가 본인의 블로그에서 부활을 해체하면서 더이상 부활이라는 밴드 이름은 쓰지 않고, 김태원은 '더 게임'으로(훗날 2020년 김태원이 유튜브 채널 김태원클라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하도 당시 상황이 안 좋다보니 자기를 떠난 이승철과 '''게임'''한다는 심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불순한 의도가 섞여있었기에 당연히 앨범이 잘 안됐던 것 같다고 자조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승철은 솔로로 활동하기로 합의봤다라고 포스팅한 바 있다. 합의가 이루어진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봐야 할듯. 단, 이승철은 [[손무현]]과 '걸프렌드'라는 그룹을 결성했다가 이후에 솔로로 데뷔했고, 김태원도 2집 게임이 망하고는 3집부턴 다시 부활이란 이름을 쓰게 된다.] 이승철은 솔로로 데뷔하자마자 [[박광현(가수)|박광현]]의 프로듀싱을 받으며 곧바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이내 대마초를 피우다 걸리는 바람에 구속되어 몇 년간은 방송 출연까지 금지당한다.[* 그리고, 대마초 혐의로 구속된 뒤 보석으로 풀려난 뒤에도 끊지 못하고 다시 상습적으로 마약을 했다가 다시 재범으로 구치소로 끌러가게 되었는데, 일명 [[똥꼬쇼]]라고 불리는 치욕적인 신체검사를 당한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독하게 마약을 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방송 출연이 없는 악조건 속에서 꽤 인기를 유지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 기간에 개그맨 [[박명수]]가 이승철 흉내를 내고 다녔고, 그래서인지 잊혀지지 않았다고. 이승철 본인도 방송에서 박명수와 관련된 질문이 나올 때마다 자신을 흉내내주던 박명수에게 고마움을 표하곤 했으며, 박명수 역시 이승철 성대모사가 본인 직업에 도움이 되었기에 감사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후 이승철 딸과 박명수 딸이 같은 유치원에 다니기도 해 친해졌다고 한다. 후술되어있지만 박명수 음색이 의외로 이승철 삘이 있다. 이승철이 솔로로 잘 나가는 동안 부활은 한동안 침체기였다. 아내의 도움으로 마약을 간신히 끊은 김태원은 비운의 보컬로 불리는 [[김재기]]를 영입, 3집 [[사랑할수록]]으로 대박을 치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김재기는 3집 녹음 도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고, 동생인 [[김재희]]가 보컬 자리에 들어와 3집 활동을 했다.] 만약 이승철이 3집까지 남아있었다면 '사랑할수록' 도 이승철의 곡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2002년 재결합 활동 당시 이승철이 콘서트와 방송에서 커버한 적은 있다.] 이 후 2002년 부활과 재결합하여 8집 '새벽' 을 발매하는데, 타이틀 곡이 그 유명한 [[Never Ending Story]]다. 2000년대에 발매된 최고의 발라드 명곡으로도 종종 평가받는 이 곡으로 이승철은 13년만에 음악방송 1위를 하는 등 제대로 전성기를 맞았다.[* 사실 이승철은 2000~2001년 사이 앨범 실패로 침체기를 겪고 있었는데, 부활과의 활동을 통해 다시 인기를 회복하며 이 후 활동을 활발히 이어나갔다. 2020년대 현재까지 이승철의 탄탄한 인기는 Never Ending Story의 큰 성공이 지양분이 된 셈이다.] 하지만 8집을 끝으로 그는 다시 부활을 떠나 솔로활동을 하게 된다. 1990년대에는 [[신승훈]]이나 [[김건모]]가 워낙 메가 히트를 치면서 앨범 판매량이나 음악 프로그램 1위 횟수 같은 대중성 측면에선 밀렸다는 평이 있었으나, 2000년대 이후의 꾸준한 히트곡까지 더하면 이승철쪽이 오히려 롱런한 케이스. 물론 그래도 원체 신승훈, 김건모가 전성기 기준 메가 히트를 했던 탓에 총 판매량에선 밀린다. 여담으로 이승철과 신승훈은 절친이기도 하다. 단, 이승철의 경우 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세대들에게 선호되는 보컬, 노래방용 노래를 많이 불렀고 잘 불렀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승철의 파란만장한 락가수 캐릭터나 뛰어난 가창력까지 더해서 특정 세대의 대중적 선호도가 대단히 높은 것은 맞으며 이런 것은 이 세대의 설문조사를 봐도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후부턴 동시대 가수들이 서서히 잊혀져가는 동안에도 꾸준히 [[히트곡]]을 내놓으면서 자리를 지켜왔다. 방송 활동도 동년배 가수들에 비해 훨씬 잦은 편. 또한 [[OST는 좋았다]]의 적절한 예시라고 할 수 있는 [[비천무]]의 '[[말리꽃]]' 이후로 영화나 드라마의 OST 분야에서도 '인연',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그 사람' 등이 호평을 받으며 좋은 성적을 냈다. 다만 2010년대 중후반부턴 활동에 비해 예전만한 히트곡이 별로 나오진 않고 있다.[* OST를 제외하면 2010년 연간 차트에 든 노래는 2013년 나온 11집 My Love가 유일하다(9위).] 물론 그 나이에 히트곡 내는 게 더 대단하긴 하지만. 물론 콘서트 활동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왕성하다. 2016년 연 30주년 기념 콘서트 등은 지상파에서 녹화 방영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