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용상 (문단 편집) === 고려로 망명 === 이용상은 고려측의 기록에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용상의 행적을 추정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화산 이씨의 족보인 《화산이씨세보》에 의존하고 있다. 해당 족보는 조선 후기에 완성되어 1920년경에 간행되었다. 때문에 역사적인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없다. 이후 서술되는 이야기는 화산 이씨의 족보 《화산이씨세보》에 있는 일화이다. 바다로 도망친 이용상의 일족과 부하들이 배를 타고 계속 나아간 끝에 도착한 곳은 [[고려]] 영토인 [[황해도]] 화산(花山)이었다.[* 지금의 옹진 반도 북쪽에 위치한 산쪽인 [[옹진군(황해도)|옹진군]] 북면 화산동리에 있다.] 이용상이 화산에 도착했을 때 마침 도적들이 백성을 잡아가는 걸 보고서 도적떼를 퇴치하고 사람들을 구해주었고, 옹진현 현령은 이 사실을 조정에 상주했다. 안남국[* 베트남의 별명, 정식 국호는 '''[[대월]]'''이었다.]의 왕자가 표류했다는 것을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크게 환영하며, 이용상이 고려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종(고려)|고종]]은 이용상의 처지를 가련히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다. 이용상은 망국의 왕자를 극진하게 대우하는 고종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고, 이에 고종은 "망국이라는 건 어느 나라도 피할 수가 없다. 내가 언제 망국의 왕이 될지 누구도 모르는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용상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했다. 그런데 이용상의 행적을 기록한 다른 사적인 <수항문기적비>(受降門紀蹟碑)[* 1903년에 세워진 비이다.]에서는 이용상이 몽골군을 격퇴한 뒤에 그 상으로서 식읍을 하사받았다고 전하고 있어 기록상의 차이가 보인다. 위의 ‘도적떼’가 몽골군이라면 얼추 맞아들어간다. 《화산이씨세보》에 적힌 바로는 이용상이 고려에 들어올 쯤에, 고종이 어느날 내전에서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큰 새 한 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와 사해 바닷가로 날개를 치고 앉았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찾아보았더니, 안남국 왕자 이용상이 왔다고 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로부터 6년 뒤에 [[고려]]는 몽골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종은 47년의 재위기간 중 30년 가까이 몽골의 침략에 맞서 치열하게 전쟁을 이어갔고, 결국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임시수도인 [[강화도]]에서 승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