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용상 (문단 편집) ===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 === 1253년, 이용상은 [[몽골]] 침략 당시 화산에서 몽골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화산군(花山君)의 작위를 받았다.[* 여기서 화산군(花山君)의 화산(花山)은 황해도 [[금천군]]을 말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91465&cid=42835&categoryId=42835|네이버 지식백과]]] 더불어 영지도 하사받아 살아가는 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늘상 저 멀리 있는 조국 대월을 그리워해서인지 조국 방향으로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망향의 아픔을 달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와 후손들의 흔적이 여전히 북녘 옹진군에 남아 있다. 황자가 고향을 보며 그리워하던 망국단(望國壇)과 적과 싸우기 위해 화산에 쌓은 성인 화산성, 조정이 이용상에게 수여한 수항문(受降門)과 그의 망명 및 귀화 사실을 기록한 <수항문기적비>가 있다. 다만 <수항문기적비>는 1903년에 세워진 것으로 수백년은 지나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이용상을 시조를 삼아 본관을 화산으로 삼았다. 그의 맏아들 이간(李幹)은 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과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고, 둘째 아들 이일청(李一淸)은 안동부사를 지내며 안동 내성면 토곡리에 정착했다. 현재 화산 이씨는 옹진을 포함한 황해도 남부에 밀집되어 있고, 경상북도 [[안동시]]와 경상남도 [[밀양시]], [[진주시]]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화산 이씨는 리 왕조를 건국한 태조 [[태조(리)|이공온]]을 1대조로, 중시조를 이용상으로 본다. 이용상은 망명할 때 리 왕조의 계보를 챙겼고, 이 내용은 이용상의 후손이 《화산이씨세보》에 남김으로써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화산이씨세보》에 기록된 리 왕조의 계보와 쩐 왕조가 기록한 리 왕조의 계보가 일치함으로써 화산 이씨가 리 왕조의 후손으로 인정받는 근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