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원익 (문단 편집) == 생애 == 명재상으로 유명한 동고 [[이준경]]의 문인으로 1569년(선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있었다. 성품이 소박하고 조용해 사람 사귀기를 즐기지 않아 공적인 일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으므로 이원익을 아는 이가 없었으나 [[류성룡]]만은 이원익의 슬기로움을 알고 존경하였다. 1573년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성절질정관(聖節質正官)이 되어 하사(賀使) 권덕여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온 1574년 예조랑(禮曹郞)에서 뽑혀 종5품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어 병적(兵籍) 정비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이 때가 [[이이(조선)|율곡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감사]]로 있을 때여서 이이의 신임을 얻었으며[* 이이가 이원익에게 모든 일을 다 맡겼을 정도라고 하는데 "일과 시간에는 내 일을 돕고, 네 직무는 일과가 끝나면 해라."라고 했다고 한다.] 후에 이이가 천거하여 1576년 정6품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고 1578년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583년 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왕자사부 하낙이 [[승정원]]이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고 상소함으로써 책임을 지고 파면되었다. 1587년 [[평안도]]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안주시#역사|안주]]에 [[전염병]]과 기근이 닥쳐 폐촌(廢村)이 될 지경에 이르자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가 이원익의 실무 능력을 이유로 추천해 정3품 안주목사에 기용되었다.[* [[윤승운]]의 [[맹꽁이 서당]]에서는 해당 일화를 소개하며 이 때의 일로 인해 '명망 높아 안주 목사'란 말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이원익은 우선 양곡 1만석을 동원해 기민(棄民)을 구호하고 곡식종자를 마련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누에]]를 치는 법을 가르치고 권장해 재활에 힘썼고, 피폐해진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번상병제의 교대 기간을 3개월에서 2개월로 줄였는데 성과가 뛰어나서 이 조치는 후에 [[윤두수]]의 건의로 전국에 확대 적용될 정도였다. 이 당시 평안도에서 대단한 인심을 얻어 백성들이 이원익의 말이라면 마치 어버이처럼 따랐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에서 이 인심을 바탕으로 평안도에서 대병력을 편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 후, 종2품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2품 [[이조판서]]로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직하여 선조가 피란하는 길에 앞장섰으며 흩어진 군사를 모아 적과 싸웠다. 이후, 조선군의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곽재우]] 등의 의병장과 교류하여 이를 위무하였고, [[한산도]]에서 열심히 자력갱생하고 있던 [[이순신]]과도 통하여 후에 이순신이 [[선조(조선)|선조]]의 정략에 휘말려 삼도수군통제사 관직을 박탈당하고 참수당할 위기에 처하자 [[정탁]], 당시 도원수 [[권율]]과 함께 이순신을 극력 변호하였다.[* 후일 [[인조]]와 대화하던 중 이 일에 대해서 이원익이 회상하길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류성룡은 뭐했느냐 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류성룡은 이순신 비판에 가담했다. 다만, 이순신에게 악의가 있는 건 아니었고, 당시 [[남인]]의 영수로서 선조가 이순신을 미워하는 것을 알았기에 자신이 무조건 이순신 편을 들면, 이순신과 남인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어 어쩔 수 없이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비판에 가담한 것이다. 다만, 못 해주면 못 해준거지 자신이 이순신을 모른 척한 이야기를 [[징비록]]에서 은근슬쩍 빼는 치졸한 모습을 보인다. 전후 가장 처음 남긴 기록인 난후잡록에는 이때 뇌물을 써서 이순신을 구명할 수는 없을까하고 찾아온 이순신의 조카 이분에게 '왜 나한테 그런걸 물어보냐?'고 퉁명스럽게 말하고 돌려보낸 기록이 있는데, 난후잡록을 바탕으로 쓴 징비록 초본에는 이 대목이 지워졌다. 써놓고 보니 자기한테 누가 될 거 같아 슬쩍 빼버린 것이다.] 1598년 명나라에서 정응태의 무고사건이 벌어지자 조선은 3차례에 걸쳐 진주사를 파견하였고 이원익은 2차 진주사로 가 현안을 해결하고 1599년에 돌아와 영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북인]]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류성룡을 변호하다가 함께 사직했다. 이후, 소하리 선산(先山)에 가 있었으나 1600년 다시 소환되어 [[이항복]]의 뒤를 이어 [[좌의정]]이 되었고, 1604년 비로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피봉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다시 영의정이 되고, 1608년 [[대동법]]을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불합리한 세금 제도를 고치게 하고 군사 제도를 [[개혁]]하였다. 사상적으로 이원익은 공리공론에 머물지 않고 정치 및 행정에 실제로 활용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 같은 사상은 최초로 대동법 시행을 정책적으로 실현한 면모를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1615년 [[인목왕후|인목대비]]의 폐모(廢母)론을 반대하다 [[홍천군|홍천]]에 유배되었으며, 1619년 풀려나와 여강(현재의 [[여주시]])에 머물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중신이자 인망이 있다는 이유로 남인 세력에다가 당시 7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영의정 직에 다시 올랐다. 이후 광해군 시절 북인 정권에 대한 처벌과 관련된 논쟁에서 온건파로서 북인 정권의 핵심 인물들만 처벌하고, 북인 출신의 단순 가담자는 봐주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는 민심을 수습해야 하고 하여금 보복의 강도를 감소시키는데 공헌하자는 주장이다. 그래서 서인 정권은 인조반정 때나 [[이괄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이첨]], 류희분, [[기자헌]], [[박홍구]]를 비롯한 북인 정권 시절에 권력 실세이자, 핵심 인물들을 처벌했다. 물론 서인 정권은 북인 중에서 권력 실세를 처벌하면서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까지 몰살하기 위해, 북인 출신인 단순 가담자까지 처벌하고 광해군 시절, 북인 내의 권력 실세와 측근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멸망시키게 해서 소북 출신이었던 남이공, 김신국, 윤휘, 이경전, 정온 등은 살아남아 정계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서인 정권 하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자 [[공주시#s-3.4|공주]]에서 늦게 소식을 접한 이원익은 "이제 나도 폐물이 되었구나. 수십 명씩 죽었는데도 알지 못했으니."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야사에서는 인조반정 직후 살기등등한 반정군 사이를 유유히 지나 유폐되어 있던 광해군에게 '왜 자기 말을 듣지 않았냐?'면서 눈물을 흘리자 광해군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인조에게 "광해군을 사사한다면 자신도 관직에 더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도 하는데, 애초에 둘 다 야사일 뿐이며 광해군을 살리는 건 인조를 포함한 반정 측 인사들의 공통된 합의였기에[* 광해군을 죽이자고 주장한 건, 자기 아들인 [[영창대군]]이 비명에 간 인목대비 뿐이며 이에 대해 반정 수뇌부는 '걸, 주가 [[폭군]]이었지만 탕, 무는 단지 이들을 추방하는데 그쳤다(그런데 [[걸왕]]이 유배당한 건 기록에 남아있지만, [[주왕]]의 경우 이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상나라]] 멸망이 확정된 이후 스스로 분신해 목숨을 끊었으며, 시신은 [[무왕]]에게 목이 베였다).'거나 '[[중종(조선)|중종]]이 [[연산군]]을 살린 전례가 있다.'면서 인목대비를 뜯어말렸다. 근데 진짜 광해군을 죽였다면 새로운 반역이 일어나 '너도 반역을 일으켜 왕을 죽였는데 나라고 못할쏘냐?'하고 하극상이나 반역이 일어난다. 옛날 중국에서 군주를 시해하고 군주에 오른 자들은 말로가 좋지 않았다. 설사 제위에 무난히 올랐다 하더라도 후손들에게 악영향을 미쳤다.] 딱히 그런 발언이 대단한게 아니라고는 하지만, 새로운 왕과 그 무리를 두고 쫓겨난 왕에게 예를 다한 점은 범상한 게 아니다. 인조반정 직후, 영의정에 올라 인조가 '당장 해야 하는 게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군사를 정비하는 것이나 인사 문제보다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민생 안정에 있어서는 공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이다'는 요지의 건의를 하여 3도 대동법(시행 지역: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시행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결 파악의 미비, 거듭된 흉년으로 인해 더 확대되지 못한 채 강원도 일대만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심지어 자신도 대동법 철폐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1624년 [[이괄의 난]] 때에 [[도체찰사]]가 되어 공주로 피란하는 왕을 모셨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에 이어 또다시 도체찰사가 되어 세자를 호위하여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다. 환도한 뒤, [[훈련도감]] 제조에 제수되었으나 80이 넘은 고령[* 정묘호란 당시 그의 나이가 81세였다.]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오리곡(지금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으로 낙향했으며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물론, 실록 기록 등을 보면, 사직 상소를 올리긴 했지만, 번번이 인조가 거절했으며, 이후에도 가끔씩 궁궐에 일이 날 때마다 원로로서 출입해 의견을 피력하기는 하였다. 1634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사후 인조의 [[배향공신|사당에 함께 모셨다.]] 4년 전에 써 놓은 친필 유서를 비롯한 유훈에는 풍수설에 구애받지 말고 소하동 선산에 안장할 것을 당부하였고, 재물로 가족들이 화목하지 못함을 경계하여 불의한 재물을 모으지 말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빈소에 [[소현세자]]가 직접 조문했다고 하며, 저서로 《오리집》 등이 있다. 1628년 연풍 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 이수약에게 내려준 지침에는 마음가짐을 비롯하여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방법 쓸데없는 일을 벌이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내용 등 실질을 숭상하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서여손수약부연풍현(書與孫守約赴延豊縣)[[http://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5618&bbsId=BBSMSTR_1008&nm=NS_01_10|출처]] > > 1. 너의 아버지는 전후 고을을 맡을 때마다 청렴과 간명(簡明)으로 백성을 보호한다고 여러 번 임금에게 알려졌다. 너는 네 아버지의 아들이니, 마땅히 마음에 새겨 자신을 가지고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라. > 1.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 1. 천하의 실정을 안 다음에야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 1. 일에 임했을 때 지나친 분노를 경계하고, 서서히 일의 실정을 파악하라. > 1. [[신상필벌|사람을 다스림에 상벌이 없을 수가 없으니, 착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자는 벌을 주어야 한다.]] > 1. 하나의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하나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다. > 1. 읍중에 일이 있거든 노련한 관리와 연로한 인민에게 물어서 인정에 합하기를 힘써야 하고, 거만을 부리고 자신이 옳다고 하여 민심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 1.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지고 은혜를 베풀어야하고, 관속을 대우하는 것도 너무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 > 1. 모든 일은 마땅히 때에 따라 마음을 다해야 한다. 어찌 일일이 지휘할 수가 있겠느냐? 그의 [[이원익 선생 묘 및 신도비|묘]]는 출생지인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있으며, 묘 주변에는 이원익을 기리는 충현박물관[* 충현박물관은 후손들이 세운 곳이다.[[http://www.chunghyeon.org/|사이트]]]과 충현역사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원익의 선산은 충현박물관과 함께 참배가 가능하다. 또한 경내에 이원익의 고택이자 종택인 관감당이 있다. 본 건물은 1916년에 다시 중건된 것이며, 과거에는 실제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었기에 관람이 불가했었으나, 충현박물관 개관과 함께 개방되어 현재는 일반인들도 관람이 가능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