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육사 (문단 편집) == 기타 == * 그의 경력이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으로(옥살이만 17번) 채워진 덕분인지 그는 [[윤동주]]와 함께 '저항 시인'으로서 평가받게 되었으며 실제로 1943년부터는 한글 사용에 대해 탄압을 가해오자 한시만 쓰는 식으로 붓을 꺾지 않으면서도 저항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게다가 두 시인 모두 해방을 목전에 두고 옥사)[* 공교롭게도 두 시인은 각각 북부 출신, 남부 출신이었다.(윤동주 시인은 한반도 출신이 아닌 연변 지역의 용정이 고향이지만 본적은 함북 청진이었다.)] 하지만 현재 윤동주는 서훈이 3급이고 이육사는 서훈이 4급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보훈처에 정정을 요구하였으나 보훈처에서는 안 된다는 말만 있어 왔다. 아무래도 윤동주는 문단에서 힘깨나 쓰는 분들과 엮일 일이 없었으므로 거부감이 적었으나, 이육사는 문단에서 숨기고 싶은 일들이 많은 분들과 엮여왔기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면 불편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생부터 남로당계 고위인사라 북한 사회주의 정권과의 연결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도 문제. 현대에야 이런 연좌제적인 사상을 거의 적용하지 않고 대중들도 이육사 시인의 동생에 대해 거의 알지도 못하지만, 여러 요건이 얽혀 영향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 동생뿐만 아니라 이육사 본인도 사회주의자였다. 1931년 이육사는 김원봉에 대해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중국의 부르주아 계급과 야합"하고, "사상이 애매하고 비계급적"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주의를 위반하여 "조선인이 중국에서 조선의 혁명 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혁명적 정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육사가 1933년 국내에서 발표한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이라는 글도 그의 이념적 성향을 잘 보여준다.[[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5230|#]] 이육사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식 때 지은 연극 '지하실'에서는 조선에 공산제도가 실현되고, 토지는 국유화되고, 노동자와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돼, 마지막으로 '조선혁명 성공 만세'를 외치는 내용이어서 이육사가 독립운동의 방향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상일 동의대 교수는 "이육사 연구는 사회주의적 성격에 대해서는 사실상 함구하고 있었다. 반공주의의 감옥에 갇혀버린 우리 현대사의 억압으로 인해 이육사의 민족주의는 보수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주자학적 전통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획일화되어 버리고 만 것"이라고 지적했다.[[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7522|@]] * 전체적으로 그의 시를 평가하자면 [[윤동주]]가 부끄러움과 반성, [[기독교]]적 희생을 주로 다루고 있다면 이육사는 남성적이면서도 목가적인, 그리고 극한에 서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표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육사의 시가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고 해서 수능에 나오면 난이도가 쉽다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딱 쉬운 난이도의 해석으로만 유도하는 고교 교육과정까지만 통하는 소리다. 이육사의 시는 상징적인 시어가 많아 의미 자체를 해석하기 어려워 이육사의 시 앞에서는 자동으로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말까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능에서 윤동주와 함께 많이 출제된 작가인데 이는 친일 행적이 없기 때문. [[199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자야곡, [[199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꽃이, [[200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교목이,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강 건너간 노래가,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초가가 출제되었다. * 오늘날 교과서에서 저항시인의 대표주자로 배우고, 또 그의 작품이 종종 교과서에 실리는 만큼 단순히 '저항시인'으로만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는 '저항시인'이라는 수식어조차 부족해 보일 정도로 평생을 초인적인 삶을 살았다. 이미 20대 초반 무렵무터 각종 독립 운동에 연관되어 감옥살이를 했으며, 만주까지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했고 조선 독립군이 사용할 무기 반입 계획에 몸소 참여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마흔 남짓한 짧은 인생이었지만 위대하게 불타오른 애국지사의 표상. *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애국,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다. '''39여년의 인생 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 [[도산서원]] 근처에 있는 [[http://www.264.or.kr/|이육사문학관]]에 가면 이육사의 딸인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1527&yy=2008|이옥비]](1941년~)씨 를 만날 수도 있다. 물론 운이 좋아야 한다. 문학관 뒤편에 거주하고 있다. 2013년 11월 3일 [[안동대학교]] 선비캠프에서 도산서원 방문 뒤인 다음날 이육사문학관 관람과 더불어 이분을 만나서 인생 및 이육사의 딸이라는 위치 등등 여러 이야기를 강연하였다. 2007년부터 이육사문학관 근처에 있는 목재고택에서 사시면서 문학관에 왕래한다[* 원래 이육사 슬하에 자녀는 1남 1녀이나 아들은 일찍 요절해 조카인 이동박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 동생인 [[이원조]]는 좌파 문인으로 활약하다 해방 후에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한다. 물론 [[박헌영]]과 더불어 숙청되는데, 여러 이설이 있지만 1955년경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옥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때문에 이육사 역시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기는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 정부 수립과는 관련이 없는데도 괜히 동생때문에 언급되기도 한다. 이육사 생전에 작품집이 발간된 적은 없었고, 이원조가 광복 후 1946년에 형의 작품집을 발간한다. * 이육사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친척 중 유명한 독립운동가가 많다. 그 중 유명한 여성 [[독립유공자]]로 [[경성트로이카]] 활동을 한 [[이병희(독립운동가)|이병희]]와 [[이효정(독립운동가)|이효정]]이 있다. [[이병희(독립운동가)|이병희]]는 이육사와 [[이재유]]의 죽음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이효정(독립운동가)|이효정]]은 [[박진홍(독립운동가)|박진홍]], 이순금과 친구이고 [[이관술]]의 제자이기도 한 경성트로이카의 핵심으로 정말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 [[대구광역시]] [[수성구]] [[동대구로]]의 궁전맨션에 이육사의 벽화가 [[서상돈]], [[이상화(시인)|이상화]]의 벽화와 함께 그려져 있다. *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포항)|남구]] [[청림동]]에 청포도 문학공원이라는 작은 기념공원이 있다. 오랜 수형생활로 건강이 안 좋아진 이육사는 한학자인 사촌형 이종형이 있던 청림동으로 휴양을 왔는데 당시 이곳은 60만평 크기의 동양 최대의 청포도 농장[* 포항 해군기지가 이 청포도 농장 부지위에 건설되었다.] 있어 이를 보고 이육사의 대표작 [[청포도]]가 만들어 졌다고 알려짐에 그를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 2019년 2월 26일 이육사 선생의 새로운 사진과 친필이 적힌 사진이 발견돼 처음으로 공개됐다. [[http://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883676.html|#]] [[파일:이육사 한복.jpg|width=300]] 동생인 이원일, 친구인 조규인과 함께 찍은 20대의 이육사(우측)의 사진. * 2019년 6월 18일자 한국일보 기사에 의하면, 이육사 선생은 대나무로 살점을 떼내는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https://news.v.daum.net/v/2019061804423589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