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음(당나라) (문단 편집) == 생애 == 이음의 모친은 [[양제(수)|수양제]]의 딸 양씨로, 태종의 3남인 오왕 [[이각(오왕)|이각]]의 동복동생이었다. 이음은 631년에 양왕(梁王)으로 책봉되었고 633년에는 양주(襄州) 자사로 임명되었다. 636년에는 봉작이 촉왕(蜀王)으로 바뀌었고 637년에는 하주(夏州) 자사가 되었고 실봉 800호를 받았으며, 639년에는 기주(岐州) 자사로 제수되었다. 하지만 문무의 재간이 있었고 총명했던 동복형과는 다르게, 이음은 매우 탐욕스러운 인물이었다. 이음은 사냥을 좋아했고 비리를 많이 저질렀으며 자사로 있을 때는 소속 현의 관리를 구타하기도 하였다. 부황인 태종이 아무리 이음을 타일러도 이음이 개과천선하지 않자, 태종은 이음에게 분노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짐승도 조련하면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철석도 제련하면 사각형의 도구가 된다. 하지만 이음은 짐승이나 철석만도 못한 놈이로구나! 태종은 이 말과 함께 이음의 봉작과 관원을 반으로 줄여버렸고, 이음을 괵주(虢州) 자사로 좌천시켰으며 사실상 이음을 버리다시피 하였다. 이음은 무절제하게 사냥을 즐기면서 농민들의 농사를 방해하기도 해서 농민들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다. 양도정(楊道整)이라는 인물이 이음의 행실에 대해 간언하기도 하였지만, 이음은 오히려 그를 붙잡고 폭행을 저질렀다. 결국 이 때문에 이음은 650년에 어사대부 이건우(李乾祐)로부터 탄핵을 당하였고, 이음의 이복동생인 [[고종(당)|고종]]은 이음의 행실에 분노하여 이음을 황주(黃州) 자사로 좌천시켰다.[* 한편 이음의 행실에 대해 간언을 했던 양도정은 고종으로부터 칭찬을 받아 광도부(匡道府) 절충도위(折衝都尉)로 임명되었다.] 653년에는 형인 이각의 역모에 연루되어 폐서인되었고 파주(巴州)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부릉왕(涪陵王)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이음은 667년에 사망하였다. 사후 함형 연간에는 이음의 작위를 추복하여 다시 촉왕으로 추봉하였고, 익주 대도독으로 추증하였다. 고종은 이음에게 도(悼)라는 시호를 올렸다.[* 시법에서 도(悼)는 일찍 죽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근로와 제사 때 방자하였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분류:667년 사망]][[분류:수당시대/황족]]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