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이(조선) (문단 편집) === 유년 시절 === 1536년 [[강원도]] [[강릉시|강릉]]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와 모친 [[신사임당|사임 신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가인 강릉에서 자라 강을 낀 산천을 보며 심신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6살 때 모계 집안인 강릉[* 강릉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며 이이에게는 따라서 외가가 있는 곳이었다.]을 떠나 부계 집안으로 이사했는데 이이 본인의 [[고향]]은 강릉이지만 본가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그래서 파주시 곳곳에 가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율곡로, 율곡수목원, 율곡습지공원 등 시설명에 호를 붙였다.]라는 곳에 있었고 이이의 아호인 '율곡'도 파주 '율곡리'에서 본딴 것이다. [[가문]]이 중요시되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고향은 '나 자신'이 아니라 '집안'이 연원을 두고 있는 곳을 의미했는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율곡의 고향은 탄생지인 강릉이 아니라 친가가 위치한 파주가 된다. 다만 실질적인 본거지는 파주가 아닌 강릉인데 왜냐하면 이원수가 신사임당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인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조선 전기에 일반적인 [[결혼]] 형태였다. 아들은 [[사돈]] 집에 들어가고 [[사위]]가 우리 집에 들어와 사는 것.] 강릉에는 외할아버지 신명화와 그 윗대로 이어지는 고리가 있고 집안 [[재산]]의 절대 다수가 있는 반면에 파주에는 진짜 아무 것도 없는데 유일한 장점은 근기(서울)에서 가깝다는 것뿐이다. 아버지인 이원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이이가 남긴 기록 중 아버지에 관한 별다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실제로 이이와 형제들은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원수 때만 해도 가세가 좋지 않아 자기들보다 가세가 강했던 집안의 신사임당과 결혼했는데 신사임당이 엄청난 인물이었던 데다가 아들까지 아버지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존재였으니 이원수 본인이 소외감을 느껴서 그랬을 듯하다.[* 신사임당의 부친인 신명화가 딸 신사임당을 편히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미한 집안의 평범한 사람인 이원수와 혼인시켜 데릴사위로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이원수는 평생 아내에게 큰 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다고 한다.] 1548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16세 때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였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한다. 18세(1553년)에 관례를 마치고 상복을 벗었으나 모친을 잊지 못하였으며 봉은사에서 불서를 읽고 나서 감명하여 속세를 떠날 결심을 한다. 19세(1554년)에 친구들에게 편지로 이별하며 절에 들어간다. 그리고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불가에 회의를 느끼고 하산하여 이후 유학에 전심한다.[* '불씨(佛氏:부처님)가 그 제자에게, 생각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라고 경계한 것은 무슨 뜻인가. 대개 그 학문은 별다르게 기묘한 것이 없다. 다만 이 마음이 내달리는 길을 끊어 정신을 집중시켜 정(靜)함이 지극하여 허명(虛明)한 경지로 나아가게 하고자 할 뿐이다. 화두(話頭)를 두고 거기에 매달려 공부하게 하는데, 또 그 사람이 미리 이런 뜻을 알면 선(禪) 공부가 알뜰하고 전일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런 금법(禁法)을 만들어서 속이는 것이다.'] 22세(1557년)에 [[성주군|성주]] 목사 노경린(盧慶麟, 1516-68)의 딸인 곡산 노씨와 혼인했다.[* '선생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노씨(盧氏)인데, 곡산(谷山)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노중례(盧重禮)의 현손(玄孫)이다. 그 아버지 노경린(盧慶麟)은 종부시 정(宗簿寺正)이요,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선공감 정(繕工監正)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에 나서 정사년(1557, 명종12)에 선생에게 시집왔다.' - 출처: 행장, [[김장생]] 저,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H&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201B_0260_010_0010|링크]]] 당대로서는 [[만혼]]이었는데 한창 결혼해야 할 나이에 어머니 삼년상을 치른 데다 삼년상 이후 불도를 익힌다고 산에 틀어박혀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했다고 한다. 사실 그가 [[삭발]]을 했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기는 했다.[* 이걸 밝혀낸 인물이 바로 [[이병도]]이다. 실제로는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기보다 거사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이 숭유억불로 유명하지만 조선 전기만 해도 유학자들 중에서 불교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고 그 중에 법명을 가진 거사들도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하루 술 3잔 [[설화]]로 유명한 손순효(칠휴거사).][* [[장유(조선)|장유]]는 율곡을 직접 만났던 두 명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게 사실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A&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333A_0390_010_0320|링크]]] 그 때도 두문불출하며 온갖 [[불경]]들을 읽어내어 주변 [[스님]]들이 생불이 나타났다며 감탄해했다고 전해지는데 머리가 좋은건 유학에서만 작용한게 아니라 불도에서도 작용한 것. 이 부분은 훗날 그를 공격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되었는데 당시 유학자들은 불교를 증오하다시피 했다. 천원권에 [[이황]]이 쓰고 있는 복건도 이황은 중이 쓰는 두건과 비슷하다고 하여 싫어했을 정도인데 이이가 한때 불교에 심취했으며 법명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비판받아 마땅한 비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조선 전기에 유학자들이 주변인의 사망에 충격받아 불교에 심취하게 되는 경우가 없는건 아니었는데 [[세종(조선)|세종]]의 경우에는 유학을 따랐지만 [[소헌왕후]]와 아들들의 사망에 충격을 받아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이는 [[성균관]]에서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하며 신입 벼슬아치들이 당하는 [[면신례]] ~~신입 길들이기~~ 도 [[학폭|심하게 당했는지]] 그는 바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를 비판했다고 한다. 다만 면신례는 본래 대상을 불문하고 혹독했는데 심지어 [[정몽주]]의 증손자도 [[과거 제도|과거]]에 급제하고 난 뒤 치른 면신례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숨졌다. 사대부들이 극진히 모신 정몽주 집안 사람이 이 정도였다면 당시 일반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던 이이에 대한 괴롭힘은 말할 것도 없이 심했을 것이다. 23세(1558년)에 [[이황|퇴계]]를 만나기 위해 도산으로 갔고 이후에도 서찰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학문을 보완하게 된다. 퇴계를 만난 율곡은 자신이 불가에 들어갔던 사실을 이야기했는지 퇴계가 편지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다.[* '지난날 남들이, 그대가 불교 서적을 읽고 꽤 중독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오랫동안 애석하게 여겼었는데, 일전에 나를 찾아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그 잘못을 말하였으며, 이제 두 번 온 편지의 뜻이 또 이러함을 보니, 나는 그대가 도에 함께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겠습니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grpId=&itemId=BT&gubun=book&depth=5&cate1=L&cate2=&dataGubun=%EC%B5%9C%EC%A2%85%EC%A0%95%EB%B3%B4&dataId=ITKC_BT_0144B_0130_010_0050\링크]]] 26세(1561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3년상을 치른다. 이후 출사 준비를 마친 이이는 29세인(1564년)에 생원시[* 장원 급제], 진사시[* 12위 급제]를 거쳐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정6품 호조정랑으로 등용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예조와 청요직인 이조좌랑,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쳤고 [[선조(조선)|선조]] 재위 1년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와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당시 율곡은 상소하여 하직하며 '어릴 때에 선학(禪學)에 물든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감히 논사(論思)의 책임을 맡을 수 없습니다.'고 하자 선조는 '예전부터 아무리 호걸스러운 선비라도 불씨(佛氏)에게 빠져들어 간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전에 선문(禪門)에 종사(從事)했다는 작은 실수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논사(論思)하는 중대한 직책을 경솔하게 체차할 수는 없다. 또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진 그 뜻이 가상하다.' 비답하였다. 이것이 이들의 첫 만남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