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이(조선) (문단 편집) == 평가 == [[서경덕]] 등이 주창한 주기론[* [[카를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서경덕의 경우는 기가 이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건 중국 성리학에도 없는 내용이었고, 이후에도 서경덕 계통의 학파는 맥이 단절되었다.]과 [[이황]]이 정립한 주리론을 조화시키려 시도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후학들이 크게 받듦으로써 '기호학파'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졌다. 흔히 이기 일원론이라고 하고 심시기(心是氣),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라고도 하는데, 퇴계학파에게는 주기론이라고 비판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심지어 서인의 두 거두인 이이와 성혼도 논쟁을 했다.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하는 이이와 '이기 분속설(理氣 分屬說)'을 주장하는 성혼 간의 율·우논쟁(栗牛論爭).] 학자적인 성취는 이후 이황과 함께 조선의 사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성리학]]을 [[주자(철학자)|주자]]가 집대성했다면 '''조선의 성리학'''은 이황과 이이가 그리했다고 볼 수 있다. 끝까지 '이'와 '심' 중심의 경학적 해석을 제일시했던 이황과 '이통기국'의 기발이승일도설이라는 독창적인 관점으로 이기의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는 해석을 고집했던 이이의 성리학은 '이기론'을 대표하는 입장들이었다. 이후 조선의 모든 붕당은 표면적으로나마 이기론의 해석에 따라 갈렸다. 조선 땅에서 500년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성리학은 이렇듯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 이기론, 18세기 인물성동이론 등의 논의를 거쳐 인간 심성론 쪽으로 치중되어 갔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이 '''심성학'''으로 변한 것은 이이 등을 필두로 시작된 이 일련의 논의들로부터 도출된 결과물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이와 이황의 성리학을 당사자들이 학문하면서 스스로 밝혔던 바와는 판이하게 각각 성리학이 아닌 율곡학, 퇴계학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대표적인 제자로 [[김장생]], [[정엽(조선)|정엽]], [[조헌]], [[이귀]]가 있다. 이이의 학문은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을 거쳐 [[송준길]], [[송시열]]로 이어져 나가며 서인의 뿌리가 되어 조선 후기 사상계를 장악하게 된다.[* 이이의 친구이자 학문적 동반자인 성혼의 학문은 사위 윤황과 외손자 [[윤선거]]를 통해 계승된다. 윤선거는 김집을 사사하기도 했고 아들 [[윤증]]으로 학맥이 이어져 나가며 소론의 뿌리 중 하나를 형성하게 된다.] 중국에선 명나라 대부터 과거 시험에서 [[양명학]] 등 다른 학문의 논리임이 분명한 견해도 이치에 맞는 훌륭한 답변이라면 정답으로 간주한 반면, 조선에서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답이 아니라면 답변자를 사문난적으로 간주하였다. 이이와 이황은 성리학 논의의 방향성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니나 말 그대로 '학문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주류 유학이 조선 중기 이후 강한 폐쇄성을 나타내면서 변화를 거부하는 경향을 드러내게 되는 폐단의 책임도 본의는 아닐지언정 일정 정도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