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이첨 (문단 편집) === 광해군기의 실세 === [[광해군]] 즉위 이후 이이첨은 궁궐 공사 문제에서 광해군과 기자헌에게 죽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광해군과 대북파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대북파 내부에서 영수로서 자신의 역할을 차츰 차츰 넓혀나갔다. 기자헌이 폐모론에 반대해 유배를 당한 직후엔 국정을 주도했다. 이이첨은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의주부윤, 이조참의, 대사간, 병조참지, 부제학, 대사성 등을 하면서 권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여기에는 광해군이 전면에 나서기 꺼리는 태도와 불안한 즉위 기반 때문에 반역을 경계하는 성격도 일정 부분 도움을 주었다. 이이첨이 권력을 강화해나가는 과정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반역(무고) 사건 발생 → [[서인]]과 [[남인]]의 처벌 반대 의사 표시 → 이이첨과 대북파들이 나가서 상소 → 광해군이 처벌을 반대 → 기자헌을 비롯한 대북 중진들까지 다시 강경하게 나감 → 광해군이 처벌을 가함 → 이이첨과 기자헌을 비롯한 대북파들이 다시 강경하게 나감 → 광해군 처벌 강화. 이러한 이이첨의 공격 패턴이 [[봉산옥사]]와 [[칠서의 옥]]에서 꾸준히 반복되었기 때문에 이이첨의 도움으로 광해군과 기자헌은 권력이 집중되었지만, 그만큼 이이첨과 대북파의 악명도 같이 가중되었다. [[류영경]]과 [[임해군]], [[영창대군]]과 [[인조]]의 동생 [[능창군]]도 광해군과 대북파의 공작으로 죽었고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심희수]]를 비롯한 서인계와 남인계 정승들도 이렇게 쫓겨났다. 적어도 폐모살제에 대해서는 광해군이 이이첨에게 끌려다녔다는 말도 일리 있다고 볼 수 있다. 칠서의 옥에 연루될까 두려워한 [[허균]]을 행동 대장으로 부리고, 그가 불안하게 행동하자 즉각 숙청한 것은 백미이다. 봉산옥사 이후로는 이이첨이 대사헌으로서 권력을 더 강화시켰고, 계축옥사 이후로는 예조판서 겸 대제학에 올라서 실세가 되었으며 한 때 신경희의 옥으로 인해서 이이첨이 위기에 처했지만 이내 해주옥사로 위기를 반전시키면서 권력을 더 강화시켜 나갔고 동시에 폐모론 당시에는 판의금부사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안건에 있어서는 광해군과 정면 대립하는 일도 많았다. 주로 [[후금]]에 대한 외교에서였는데 광해군은 중립 외교를 주창한 반면 이이첨은 "후금 사신 목을 베고 후금과 한판 싸워보자"고 맨날 선동하고 다녔다. '''그러니까 이이첨은 척화파였다.''' 광해군이 하도 열받아서 "니가 한번 붓으로 싸워보지 그래?" 라고 하니까 이이첨은 "부모와도 같은 [[명나라]]가 [[맹수]] 같은 오랑캐들에게 당하는데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고 당당히 항변했다. 이러한 이이첨의 항변에 황당해한 건 광해군 뿐이었고, 소북의 류희분 등 유자들로 이루어진 조정은 오히려 감동했다.[* 사실 이이첨이 폐모살제를 주장했기에 되려 이런 부분에서는 의리론을 강력히 주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사실 폐모살제를 명분삼아 집권한 서인은 권력을 이끄는 상층부의 경우 외교 방침이 이이첨보다는 광해군에 가까웠다.] 그래서 광해군은 말년이 되자 이이첨 처리 문제로 골치깨나 썩었다. 대북 세력 내에서 [[기자헌]]이 폐모론에 대해 반대하자 이이첨은 [[하극상]]을 벌이며 그를 유배 보냈고, 그 결과 조정 전체에서 그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이다. 문제는 이이첨의 권력이 강해졌다고 해도 그 위치 또한 어중간했다는 것이다. 기자헌을 유배보낸 직후에 이이첨은 대북파의 실질적 영수였으나 그보다 더 경륜 있던 [[정인홍]]의 관록을 넘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정인홍을 비롯한 여타 대북파 주도자들과 항상 타협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본인이 필요 이상 더 강경하게 나가야 할 때도 있었다. 이이첨이 바보도 아니고 당시 정세를 몰랐을 리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립 외교를 주장하는 광해군에게 그냥 동조를 해버리면 자신의 권력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이첨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강경 반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광해군은 폐모 이전 시절 이이첨에게 보낸 신뢰를 점점 거두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다른 시대의 권력자들과 달리 보는 눈이 많은 앞에서 행동대장으로 움직여야 했다.[* 실제로 이이첨보다 몇 배나 강한 권력을 가졌던 [[한명회]]는 실록의 묘사만 보면 이이첨보다 약해보일 정도다.] 광해군 재위 후반에 들어가면 이이첨이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기자헌에게 [[하극상]]을 일으키고, 허균까지 [[팀킬]]한 이이첨의 권력이 커지자 그 반동으로 당시 왕권이 다소 약화되어 있었다. 결국 광해군은 말기에 이이첨을 견제하고 균형 잡힌 인사를 추진하려 했다. 이이첨은 1621년을 기점으로 권력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삼사에서도 이이첨의 세력이 물러나면서 이이첨은 유생들과 삼사에게 여러차례 탄핵을 받는다. 이에 대북은 광해군과 슬슬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를 틈타 서인 세력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인조반정]]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반정 직전에 치명적인 기밀이 [[소북]] 출신 정승인 [[박승종]]과 박홍구한테 누설됐으나 광해군은 이를 접했음에도 이이첨의 농간이라 보며 큰 신경을 쓰지 않아 역모 진압의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