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자겸 (문단 편집) === 하늘을 찌르는 세도 === ||<-3><:> '''{{{#white 예종 시책문[* 실물은 사라졌으나 동문선 제28권에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에 기록된 이자겸의 관작}}}''' || ||<:> '''{{{#white 직위}}}''' ||<(>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br](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br]-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br]겸 서경유수사(西京留守使) ||<(> 평장사는 [[중서문하성]]의 차관.[br]판상서이부사는[br][[상서성]] 이부의 장관.[br]서경유수사는[br]서경 조정의 최고 장관. || ||<:> '''{{{#white 수직}}}''' ||<(> 수태보(守太保) ||<(> 삼사(三師) 직 중[br]가장 낮은 직위. || ||<:> '''{{{#white 공신호}}}''' ||<(> 익성동덕추충좌리공신[br](翊聖同德推忠佐理功臣)||<(>좌리공신호.|| ||<:> '''{{{#white 훈위}}}''' ||<(> 상주국(上柱國)||<(>최고위 훈위.|| ||<:> '''{{{#white 작위}}}''' ||<(>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인천의 백작.|| ||<:> '''{{{#white 향직[br]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 1품 1등위 명예 품계.|| ||<:> '''{{{#white 문산계[br]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종 1품 최고위 실질 품계.|| ||<-3><:> '''{{{#white 인종의 장인 및 외조부 시절 직위}}}''' || ||<:> '''{{{#white 직위}}}''' ||<(> 중서령(中書令)[br]- 영문하상서도성사[br](領門下尙書都省事)[br]- 판이병부(判吏兵部)[br]- 서경유수사(西京留守事) ||<(> 중서령은 고위 왕족이나[br]공신만 봉해지는 명예직.[br] 영문하상서도성사는[br]문하성과 상서성을[br]모두 아우르는 명예직.[br]판이병부는[br]이부와 병부의 장관.[br]서경유수사는[br]서경 조정의 최고 장관. || ||<:> '''{{{#white 수직}}}''' ||<(> 수태사(守太師) ||<(> || ||<|2><:> '''{{{#white 공신호}}}''' ||<(> 협모안사공신(恊謀安社功臣)||<(>안사공신호.||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 ||<(>익명공신호.|| ||<|3><:> '''{{{#white 작위}}}''' ||<(> 소성후(邵城侯)||<(>인천의 후작.|| ||<(>한양공(漢陽公)||<(>서울의 공작.|| ||<(>조선국공(朝鮮國公) ||<(>조선국의 공작.|| ||<:> '''{{{#white 자칭 직위}}}''' ||<(>지군국사(知軍國事)||<(> 윤관이 받은 지군국중사 직위와[br]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br]스스로 칭한 것으로[br]인종의 윤허는 받지 못했다. || ||<:> '''{{{#white 관저}}}''' ||<(>의친궁 숭덕부 중흥택[br](懿親宮 崇德府 重興宅) ||<(> 중흥택은 원래 개명택으로[br]이자겸의 조상이 살던 곳이다. || [[예종(고려)|예종]] 사후에 자신의 외손자인 [[인종(고려)|연소한 태자(훗날 인종)]]를 즉위하게 하고 부를 설치하여 이름을 숭덕부라 칭해 요속[* 僚屬, 딸린 무리.]을 두었다. 이자겸은 인종 즉위 후에는 중서령 겸 영문하상서도성사라는 [[관직]]에 올랐는데 특히 영문하상서도성사는 그 이전에는 기록을 볼 수 없는 사실상 이자겸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상국]]급 관직이다. 혼자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의 최고 관직을 독식한 것이다. 이자겸의 작위는 처음에는 소성군 개국백(邵城郡 開國伯)에서 소성후(邵城侯), '''[[서울특별시|한양]]'''공(漢陽公)이었는데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조선'''국공(朝鮮國公)[* 이자겸의 난 이후 박탈당하고 사후 한양공작으로 다시 추증됐다.]으로 올렸다. 당시는 공식 국명이 [[고려]]이고 [[조선(동음이의어)|조선]]은 여러 별칭 중 하나인데다 국공이라는 작위 자체는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참 의미심장한 작위명이다.[* 훗날 [[전주 이씨|본관]]은 다르지만 [[이(성씨)|성씨]]가 같은 [[태조(조선)|어느 무장]]이 [[역성혁명]]으로 [[조선|새로운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실로 기묘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은 당시에는 주로 [[서경(고려)|서경]], 즉 [[평양시|평양]] 일대를 따로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했으므로 [[오등작]] 제도에 따라 서경 일대를 형식상의 봉지로 하사하는 의미의 분봉 작위.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원 이씨와 왕실의 혼인 관계.jpg|width=100%]]}}}|| 여기에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왕후]]로 삼게 하여 왕의 권세와 총애를 독차지했고 [[매관매직]]과 수뢰로 [[재산]]을 부정 축재하는데,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는 이자겸의 둘째 딸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인종의 [[이모]]가 된다. 아무리 [[고려시대]]가 [[근친혼]]에 덜 엄격했던 [[사회]]라고 해도 3촌 간의 [[혼인]]은 고려 초에도 흔하지 않았던 만큼 당연히 반대가 어마무시했지만 이자겸 본인의 [[권력]]으로 묵살되었다.[* 이자겸이 첩을 두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오직 한 명의 부인인 최씨에게서만 많은 자녀를 둔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중 예종의 비가 된 문경태후(순덕왕후)는 아들 인종과의 나이 차이는 불과 15살밖에 나지 않는다. 이자겸은 문경태후의 동생들이자 가장 나이가 어린 두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이게 했는데, 정확한 생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정황상 인종과의 나이 차이는 크게 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이자겸이 당시 최강의 권신이고 나이 어린 두 딸과 인종의 나이 차이가 크지 않다고 해도 인종과 같은 항렬(사촌뻘)이 아닌 이모(삼촌뻘)를 왕비로 들인 것에 대해 당시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만약 이자겸이 본인의 아들들의 딸, 즉 친손녀 중 인종과 나이대가 맞는 여식을 왕비로 들였다면 비판의 목소리는 적었을 것이며 권세를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자겸이 친손녀를 인종의 왕비로 들이지 않고 굳이 딸들을 왕비로 들인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그에게 친손녀가 아예 없었거나, 친손녀가 있었지만 당시 인종의 나이대와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오히려 어린 두 딸이 인종과 비슷한 나이대여서 이자겸 본인으로서는 친손녀보다 딸이 더욱 안성맞춤이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일곱 아들들도 이 덕분에 높은 [[벼슬]]에 올랐다. [[장남]] 이지미는 추밀원 부사, [[차남]] 이공의와 3남 이지언과 4남 이지보는 각각 형부, 공부, 호부의 [[시랑]]과 낭중 벼슬을 맡았다. 조선으로 따지면 [[참판]], 지금의 [[차관]]직에 오른 것이다. 5남 이지윤은 전중내급사, 6남 이지원은 합문지후, 7남 의장은 수좌[* 고려의 모든 [[승려]]를 관장하는 승통 다음 가는 자리로 대부분 승통은 왕족 출신의 승려들이 올랐다.]에 오르게 되었다.[* 굳이 현대의 [[대한민국 정부]] 체제에 비유하면 아들들이 [[대한민국 대통령]] 비서실장,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국토교통부]]/[[기획재정부]] 차관, [[대통령비서실]] 의전과장, ([[국교]]의) 교구 [[대주교]] 직 등 요직이라는 요직들을 줄줄이 꿰찬 격이다.] 거기에다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서 [[군부]]의 핵심 인사로 떠오른 [[척준경]]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동시에 자신의 6남 이지원을 척준경의 [[사위]]로 맞게 했으며 이를 통해 권력이 더욱 강해지게 되었다. >...이자겸은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하고 관직을 팔아 자기의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스스로 국공(國公)[* 고려 [[오등작|오등봉작제]] 중 최고 [[작위]]] 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 [[절일]]로 천자 및 직계 가족의 생일에만 붙이는 명칭]이라 하고, 국왕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그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왕에게 그 책봉식을 궁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게 했고, 시간까지 강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였다. >---- >'''『고려사』 권127 반역열전 이자겸 편''' 《[[고려사]]》반역열전 이자겸 편의 일부 글이다. 이자겸은 오랫동안 자신의 [[재물]]을 축적하는데 열중했고 그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개성시|개경]]의 [[백성]]들이 이자겸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자겸은 권세가 가장 강했을 때는 스스로를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칭하고[* 군권을 왕 대신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자겸은 지군국사가 되기위해 인종을 불러다가 "언제 몇 시에 날 책봉하라"고 했지만 결국 책봉되지는 않았다. 왕조차도 마음대로 다룬 그의 권세를 알려주는 일화다.] 조선국공이 되어 [[지위]]를 태자와 같게 하였다. 이 외에도 세도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절일|군주의 생일]]이 아닌 이자겸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하려 했다. 그 이름도 국왕과 태자의 생일에만 붙이는 절(節)을 붙여 인수절(仁壽節)이라 정했을 정도다. [[김부식]]이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김부식이 아뢰었다. “생일을 절이라 일컬음은 예로부터 없던 바, [[현종(당)|당현종]] 때에 비로소 황제 생일을 일컬어 천추절로 삼았으니, 신하(人臣)의 생일을 절을 칭함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富軾 言 "生日稱節 自古所無 唐玄宗時 始稱皇帝生日 爲千秋節 未聞人臣有稱節者." 《고려사》 권제98, 3장 앞쪽, 제신열전 11 김부식 편] 이자겸과 그의 무리들은 공공연하게 인수절을 운운하며 위세를 과시했으며 전문(箋文)[* [[태자]]와 [[제후]]에게 [[신하]]가 올리는 글이다. [[천자]]는 표문(表文)이라 한다.]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국력이 급성장한 [[금나라]]([[여진족]])에서 고려에게 자신들에 대한 사대를 요구하자 이자겸은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고려와 [[요나라]]([[거란족]])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며 사대 [[정책]]을 펴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척준경도 동조했는데 단순히 이자겸의 주장에 묻어갔을 가능성과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치킨 호크]] 문서에 나오듯이, 참전 경험이 있는 인사가 오히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대외 온건책을 주장하는 사례는 흔하다.] '[[전쟁]]보다는 [[사대]]가 더 낫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일 가능성이 공존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