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정기 (문단 편집) === 말년과 죽음 === 이후 779년, [[대종(당)|대종]](代宗)이 붕어하고 절도사들에게 강경한 입장을 보인 [[덕종(당)|덕종]](德宗)이 즉위하자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결국 덕종이 절도사 세습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정기는 주변 절도사들과 함께 당 조정에 대향하는 '''4진의 난'''[* 치청 번진 + 성덕, 위박, 노룡 등 하북 3진]을 주도했다. 이때 이정기는 병력을 조주에 집중시켜 전면전을 벌인 끝에 대운하를 차단하여 당 조정을 위협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이정기는 781년에 숨을 거두었고[* 재위: 765~781, 재위기간: 17년, 향년 50세] 이후 그의 아들인 [[이납]][* 재위: 781~793, 재위기간: 12년, 향년 35세]이 15주의 절도사 지위를 이어받았다. 이정기 사후 그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李劉), 덕주의 이사진(李師眞), 체주의 이장경(李長慶)이 당 조정에 투항함으로서 12주가 되었고, [[대운하]] 등은 다시 조정의 통솔로 돌아갔다. 이후 [[평로]]치청 번진은 지속적인 게릴라성 운하 진출 등으로 최대의 독립 번진이자 당 조정에 반항하는 하북 번진들의 핵심적인 축으로 [[후희일]] 때부터 치면 60년간 조정의 근심거리가 되었으며, 이씨 가문의 통치는 이정기 이후 이납, [[이사고]][* 재위: 793~807, 재위기간: 14년, 이납의 아들, 향년 38세], [[이사도]][* 재위: 807~819, 재위기간: 12년, 이사고의 배다른 동생]까지 4대 55년간 이어졌다. 결국 [[헌종(당)|헌종]]이 805년에 즉위하면서 삭번정책에 따라 토벌전을 펼쳐 나머지 3진을 멸하자 이씨 가문의 제나라(평로치청 번진) 역시 강경하게 나가 조정에 맞서게 되었다. 멸망 직전에 이사도는 하음창을 급습하고 재상 무원형을 암살하며 배도에게 중상에 입히는 등의 성과를 보였지만 결국 당 조정과 친당(親唐)파 [[절도사]], 그리고 [[신라]]의 [[김웅원]]이 지휘하는 지원군 30,000명의 연합공격으로 멸망했다. 하지만 이사도의 반란은 819년 2월에 진압되었는데, 신라는 5개월 뒤인 819년 7월에야 구원군 파병 의사를 밝혔다고 되어있기 때문에 실제로 출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젊은 시절의 [[장보고]] 등 당군 소속 신라인들은 별개로 이사도 토벌에 참여했다. 이때 [[장보고]]가 회서 번진의 오원제를 토벌한 명장으로 이름높았던 서주의 무령절도사 이소의 휘하에서 소장으로 참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정기 일가는 일시적으로 '''[[제나라#s-7|제]]'''(齊)라는 명칭으로 독립국가 행세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주변 하북 번진들이 다같이 [[위나라|위]]나 [[조나라|조]], [[연나라|연]] 등의 국호를 내세워 독립국가를 세울 때, 행동을 같이한 것이라서 '''독립적인 '왕조' '''라기엔 좀 미흡한 구석이 많다. 더욱이 이는 이정기 때가 아닌 [[이납]] 때의 일이었다. 실제로 하북 번진들이 국호를 내세우는 걸 포기하자 '''제'''(齊)라는 국호를 내세우는 것도 금방 포기해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