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환(방송인) (문단 편집) ===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 === 위에서 여러 번 언급됐지만, 이종환의 이면에는 ''''연예계의 밤의 대통령\''''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연예계의 실력자에 위치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게 좋은 말이 아니다.''' 실상 1970년대 쎄시봉 시절부터 그가 데뷔시켜 스타가 된 인물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그는 단순한 DJ가 아니라 연예계에 막강한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영향력이 절정이던 1970 ~ 1980년대에는 갖가지 흉흉한 연예비리의 주인공으로 회자되었으나, 연예계에서 매장 당할 것을 우려한 당사자들이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아 겉으로 드러난 일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많다. 그 중 아래의 내용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당연히 여기 나오는 내용들은 포털에서 거의 검색되지 않는다.''' 그나마 찾을 수 있다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정도? 참고로 과거에는 [[스마트폰]]으로는 뉴스 라이브러리는 못 봤으나, 현재는 HTML5 기반으로 변경되어 스마트폰으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글씨가 하도 작아서 일일이 확대하여야 한다는 것이 흠이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밉보인 [[연예인]]들은 거의 망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타짜로도 유명한 피터 야마구치라는 한일혼혈 [[미국인]] 가수는 1988년에 음반을 냈으나,[* 타이틀곡인 '리버 까페'는 라디오에서 꾸준히 전파를 탔다. 그러나 이 노래는 [[유튜브]]에서도 검색이 안 될 정도로 현재는 거진 잊힌 노래가 되었다.] 이 사람에게 모종의 이유로 밉보여서 수억원을 방송가에 뿌렸는데도 방송에 나올 기회를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연예계를 떠났다. 지금은 그래서 카지노(갬블러) 관련 쪽으로 돌아갔는데, 그 쪽에서라도 성공했으니 다행이다. [[스캔들]]로 인해 촉망 받던 젊은 여가수의 앞길을 망친 단초를 제공한 일도 있다. 표면적으로는 이 여가수가 자해를 했다고 알려졌지만, 강력 범죄급의 테러로 인한 것이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것이 바로 이수미 면도칼 자해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의 일면을 제대로 드러낸 [[흑역사]] 중 대표적인 사건은 바로 ''''박성원 자살 사건''''이다. 이종환이 프로듀서 겸 DJ로 일하던 1974년 11월, 당시 '''귀여운 뚱보''' 컨셉[* 1980년대 초반 [[유머 1번지]]나 젊음의 행진 등에서 보였던 [[김형곤]]의 캐릭터와 유사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그 때 연예계에선 상당히 드물었던 현역 대학생([[경희대학교]] 사학과)이었던 [[개그맨]] 박성원이 이종환 자신을 [[뒷담화]]했다는 이유로 이종환 본인이 운영하던 음악감상실에 감금하고 집단 폭행한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일이다. 피해자인 박성원은 그 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인 1975년 3월, 자택에서 [[자살]]했다. 향년 22세. 이 사건으로 당시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그의 대학교 친구는 충격을 받아 꿈을 접고 공부로 발길을 돌렸다. 이후 경희대 [[교수]]를 거쳐 [[이찬진]]과 함께 [[한글과컴퓨터]]/드림위즈 부사장을 지냈고, 2000년대 초 대한민국 인라인 스케이팅의 붐을 이끌었던 Dr. Spark's column([[박순백 칼럼]]) 운영자인 박순백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근데 정작 대표 [[진보주의]] [[가수]]인 [[신형원]]은 1980년대 이종환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에 나와서 "[[개똥벌레(노래)|개똥벌레]]"를 불러서 유명해졌다. 이종환의 정치적 성향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해가 안 가는 일이지만, 그 당시에는 [[보수주의]] - 진보주의 갈등이 그다지 심한 때가 아니였다. 군부의 독재가 너무 심하다 보니 오히려 보수 지지자쪽까지 민주화를 열망했던 시기였던지라 가능한 얘기였다. 아주 드물게 월간조선에서 빤한 주례사 비평으로 심층 인터뷰를 하였는데, 당시 인터뷰를 하던 기자가 위에 나와 있는 여러 흑역사들을 꼼꼼히 물었는데, 이에 대한 이종환의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이 일품. 이를테면 박성원도 그냥 자기가 무서워서 갑자기 자살했다는 식의 이야기로 썰을 풀었다. 그렇게 숱한 흑역사를 만들어 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연예계에서 이종환을 존경하는 이들이 꽤 된다. [[MBC]] 라디오에서 이종환과 오랜동안 인연을 맺었던 가수 [[이문세]]의 경우, 이종환을 '''[[이영훈(음악가)|이영훈]]'''과 더불어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최고의 인기방송 진행자 때 자신을 고정으로 써 줘서 유명해지고, [[히트곡]]도 많이 쓰게 됐다고 하며 사실 이문세는 [[무명]] 시절 "달리는 중계차" 등의 아역 프로그램의 [[MC]]를 전전했으나, 이종환의 영향력으로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를 맡아 1980년대 중반에 탑스타의 반열에 올라 오늘의 위치까지 왔으므로,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장례식에 조문을 온 '''[[조용필]]'''이 "이종환 씨가 들려 주는 음악을 통해 꿈을 키우고 무대를 그릴 수 있었다. '''나에겐 영웅이었다'''. 방송국에서 뵐 때마다 저나 동료, 후배들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셨다. 아직도 고인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이종환 씨는 1960년대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분같다. 좋은 음악들을 많이 들려 주셨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며 Y스타에 의하면 [[이수만]]도 다녀갔다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 연예계를 지배하는 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대한민국]] 대중음악사 초기의 공과를 얘기하며 이종환이 어떤 일을 벌이든지간에 (자기에게는 큰 이익을 주었으니까) 계속 강력히 옹호해 왔기 때문에 저렇게 구렁이 담 넘듯이 지나갈 수 있었다. 저렇게 [[김성근|내로남불과 자기합리화를 일삼고, 자기와 코드가 잘 맞는 사람은 철저히 챙기는 반면, 자기 눈밖에 난 사람은 거품 하나 남기지 않고 매장시켰으니]], 사후 인물 평은 [[극과 극]]일 수밖에 없다. 완전히 뒤돌아서 버리는 건 기본에, 타협도 없었다. 문제는 흑역사적인 사건을 제외하고도 저렇게 챙기기와 죽이기 모두 자기와의 연줄이 있느냐의 여부에 따른 것이니 제3자 입장에서는 결코 좋게 보기 힘들다는 거다. [[분류:대한민국의 남성 방송인]][[분류:1937년 출생]][[분류:1964년 데뷔]][[분류:2013년 사망]][[분류:아산시 출신 인물]][[분류:덕수 이씨 충무공파]][[분류:폐암으로 죽은 인물]][[분류:경복고등학교 출신]][[분류:별이 빛나는 밤에/역대 별밤지기]][[분류:이순신 가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