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군 (문단 편집) === 중세 === 중세 초기는 암흑기라 불린 시절로서 [[고대 로마]]의 빛나는 유산들조차 심심찮게 이민족들에게 털려나가서 이미 옛 로마의 영화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특히 [[이슬람]]이 생기면서 [[무슬림]]들은 기독교도들을 베어 넘기는 걸 사명으로 여기고 툭하면 침략하곤 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서방은 정치적 중심점도 없이 각 지방의 영주가 겨우 다스리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조직적인 무슬림들의 해적 행위를 막을 방법은 없었고 가면 갈수록 극성스러운 이슬람 해적들 덕분에 이탈리아 연안지방은 완벽히 진공화 되었다. 지금도 이탈리아 해안가에 가보면 어디서나 수십 개의 감시탑을 볼 수 있는데 전부 해적들을 미리 발견하고 '도망' 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게 중세나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근대까지 저랬다. 북아프리카 해적인 [[코르세어]][* [[스타크래프트]] [[프로토스]] 커세어의 어원이다.]들은 이탈리아 연안을 19세기 초반까지도 약탈하고 주민들을 잡아가서 노예시장에 팔았다. 해적들에 맞서 방어하기 좋도록 길이 미로처럼 건설되어 현대 이탈리아 도시의 모습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단지 몇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간 이슬람에 탈탈 털리고 교황까지 잡아갈려고 로마에 침입한 무슬림들은 그리스도교도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지만 결국 스스로 국가 조직을 만들어 방어하기로 결정하기까지 끔찍한 나날들을 보내게 된다. 빛나던 로마의 유물과 호화찬란한 건물들, 그리고 수많은 재물들이 싹 사라졌으니 암흑기라고 하는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며, 이때 정치적 구심체가 되었던 것이 가장 먼저 이슬람 해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 도시국가들인 [[베네치아]], 아말피, 피사, [[제노바]]. 중세 초기 암흑기의 이탈리아에는 동로마 세력과 야만족 세력이 항상 자리다툼을 했다. 동로마의 군대는 당연하지만 [[로마군]]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니만큼 자세한 논의를 생략하더라도, 고트족이나 롬바르드인은 강력한 군사 세력이었다. 고트족은 강력한 보병 위주의 군대를 구성했고 뒤로 갈수록 중기병의 비중이 늘어났지만 동로마에 의해 리타이어했고 그 뒤에 이탈리아로 밀고 내려온 롬바르드인은 중기병 위주의 군대를 구성하여 유럽에 명성을 떨쳤다. 강력한 이탈리아의 기병 전력은 10~11세기 들어와 노르만인이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면서 더더욱 명성을 떨쳤다. 중세의 이탈리아군은 전쟁놀이나 하는 [[용병]] 집단으로 보통 간주되지만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지 전투력 문제가 아니었다. 이탈리아의 장인들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갑주]]는 유럽 최고급이었고 [[석궁]]수[* 그 당시 이탈리아의 석궁은 유럽에서 최고를 자랑했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는 석궁 쏘기 대회를 벌인다.]나 [[기사]] 같은 용병들은 유럽 전역에서 고용되었다.[* 물론 대부분이 석궁수 같은 보병들이다. 이탈리아는 국토 대부분이 산지라서 말을 많이 키울 만한 목초지가 부족해 군마 생산이 저조했다. 그래서 이탈리아는 항상 [[스위스]], [[스코틀랜드]]처럼 보병 중심이었으며 기병인 기사들은 모두 다른 국가에서 모집한 비이탈리아인 용병이다. 이 기사들은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용병 생활을 하다가 계약이 끝나면 다른 나라로 가서 용병 생활을 하는 것이다. 고대 로마군 병사의 전형적인 이미지가 글라디우스 검과 사각 방패를 착용한 보병의 모습인 건 잘 알려져 있는데, 이도 이런 점과 연관이 깊다.] 병사들 뿐 아니라 장군들의 역량도 막강했고 용병대장을 뜻하는 [[콘도티에리]]들은 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이들의 우수한 전투력을 입증하는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특히 각 도시의 시민군의 경우는 당시 어떤 도시의 시민군과 비교해봐서도 꿀리지 않는 전력을 구축했다. * 12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국가들은 [[신성 로마 제국]]에 포함되기를 거부하고 롬바르드 도시동맹을 결성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1세]]의 군대를 격파, 자치권을 얻어냈다. 12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훗날과 같은 허수아비가 아니었음에도. 이때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시민군들은 황제의 기사들과 치열한 전투 벌여 결국 공격을 막아내면서 승리에 일조했다. * 14세기, [[백년전쟁]] 당시 [[영국군]]의 [[장궁]]에 혼이 난 [[프랑스군]]이 이탈리아에서 기병과 석궁수를 고용해서 전투에 투입했다. 이탈리아 기사들은 장궁의 [[화살]]을 몽땅 튕겨내고 영국군을 발라버... 릴 뻔했다. 일단 이탈리아 기사들이 영국군 측면부대를 패주시키는 데 성공. 그러나 중앙을 내버려둔 채 영국군 본진을 털러 갔다가 프랑스군이 역관광 당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기사들은 적절하게 본진을 털어먹고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았다'''.[* 사실 이탈리아 기사들이 영국에도 고용되었기에 괜히 영국과 감정상하면 돈을 벌기가 힘들어 지기 때문에 일부러 추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 15~16세기, 이탈리아를 침공한 프랑스나 [[스페인]] 왕들은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인 무장을 앉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한 프랑스군, [[스페인군]]이라고 해도 보통 병력의 절반 이상은 이탈리아 현지에서 모집한 용병이었다. 특히 스페인군에서 이탈리아인 부대는 두번째로 강한 부대였다. 세번째로 강한 [[벨기에]]의 왈롱인과 스페인령 [[부르고뉴]] 출신 부대만 해도 웬만한 유럽 국가 최정예 보병대와 동급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무진장 강한 거다.[* 물론 첫번째로 강한 스페인 본토 출신쯤 되면 괴수다. 부르고뉴의 경우 15세기 후반 익히 유명한 용담공 카를이 덜컥 전사한 이후 수도 디종시 일대는 프랑스가 먹었으나, 남쪽 부분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먹어 '(중앙인 스페인 왕실에게서 자치를 누리는) 자유 백작령'이란 뜻인 오늘날의 프랑슈콩테 지방이 되었고, 많은 수가 스페인군에 지원했다. 여담이지만 당시 네덜란드 전역에서 주로 싸우던 스페인군에는 [[잉글랜드]], [[아일랜드]] 등에서 '''카톨릭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망명온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고, 이들도 저렇게 언어별로 구성 된 부대에 편성 되 상당한 이름을 떨쳤다.] 게다가 이 당시 이탈리아 반도에서 나폴리, 시칠리아 같은 남부 전체는 아예 [[아라곤 왕국|아라곤]]과 [[동군연합]]으로 스페인 왕실의 땅이었고, [[밀라노]]도 그랬으며, [[제노바 공화국]]은 실질적으로 스페인 제국의 은행 역할, 즉 따지고 보면 진정으로 스페인의 영향력에서 명분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독립해 있다고 할만한 세력은 [[베네치아 공화국]] 밖에 없었던지라 스페인 제국 내에서 이탈리아인들의 지분도 굉장히 컸다. 프랑스 왕이 여흥 삼아 12:12의 마상시합을 개최한 적이 있었는데 이탈리아 기사들이 프랑스 기사들을 12:0으로 발라버렸다.[* 사실 이탈리아의 기사들은 모두 용병이라서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상태였다. 또한 그때 토너먼트에 참가한 프랑스 기사들은 아직까지 전투 경험이 부족했기에 발릴 수밖에.] 지휘관 중에서도 해군 지휘관으로는 당대 최고였던 안드레아 도리아, 대포 전문가로 이름이 높았던 페라라 공작 알폰소 데스테, [[파비아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페르난도 다바로스, 스페인 역사상 손꼽히는 명장 가운데 하나인 암브로시오 스피놀라 등 전근대 유럽의 전장을 풍미한 이탈리아인이 많다. * 이탈리아의 발달한 대포와 축성기술[* 이탈리아식 [[성형 요새]]는 당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포의 포격을 견딜 수 있는 구조의 요새였다. 유럽에서 이탈리아식 요새가 보급된 것은 대포의 시대에 유럽에서만 대제국이 출연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은 유럽 각지로 수출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의 축성기술은 근세 [[요새]] 축성술의 기반이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같은 '''미술가'''로 알려진 사람들도 수많은 무기를 개발하고 요새를 건설한 군사기술자로서도 활동했다.[* 아예 본업이 [[건축가]]이자 공학자라고 보는 경우도 많다.] 다만 [[대포]]가 본격적으로 발달하면서 이탈리아는 점점 대포 기술에서 뒤떨어지게 되었다. 운송 수단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서 광산 인근에서 직접 대포를 만드는 것이 대세였는데 이탈리아에는 구리나 철 등의 광산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탈리아의 총포 제작 능력은 21세기에도 세계구급 역량을 자랑한다. 16세기부터 총 장사를 해온 [[베레타]], 함포로 먹어주는 오토멜라라가 모두 이탈리아 회사다. 앞에서의 기술은 화려하지만 전투력과 전투의지는 별개라는 점을 분명히 하자. 이렇게 강력했음에도 이탈리아의 군사적 역량이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것은 이탈리아 용병들이 '''용병으로서의 입장'''에 너무도 충실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 [[용병]]은 몸이 재산이다. 따라서 이탈리아 용병들은 전쟁터에서 가능한 직접적인 전투를 피했다.--그럼 [[스위스 용병]]은??[* 스위스 용병은 다른 일거리가 없어서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역 단위로 모집되므로 찌질이가 하나 나오면 그 지역 출신 후배들의 취업길을 막아버린다. 하지만 이탈리아 용병은 용병이 안 되어도 농사를 짓든지 취업을 하든지 할 일이 많은 데다 일단 개인 차원으로 움직이므로 자식이나 후배의 용병 취업에 주의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스위스 용병은 그 누구보다도 신용에 목을 매서 [[사코 디 로마]] 사건에서도 끝까지 교황을 지켰고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도 루이 16세는 이들을 위해서 더이상 용병으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시민들에게 맞서다가 죽었다.]-- * 용병은 고용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중세 유럽의 모든 용병들이 마찬가지였다. 용병들은 전쟁이 끝나면 계약만료가 되어 다시 실업자가 되기 쉬워 도적질까지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따라서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들도 용병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해고될 것이 뻔하므로 가능한 전투를 질질 끌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베네치아의 경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장기계약으로 용병을 고용해서 사실상 정규군처럼 운용했다고 한다. * 이번 전투가 끝나 해고되면 다음에는 혹시 상대편에 고용될지도 모르므로 원한을 살 일을 해선 안 된다. 따라서 가급적 상대편 민간인에 대한 약탈은 피한다. 하지만 '''적군'''의 군수품이나 휴대품에 대한 약탈은 기회만 닥치면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백년전쟁의 사례에서 영국군의 전열을 돌파한 이탈리아 기병들은 흩어진 영국군을 내버려둔 채[* 전투에 이기려면 적이 흩어졌을 때 몽땅 잡아죽이는 게 정석이다.] 영국군의 '''본진을 털기''' 시작했다. 벙 쪄서 그 꼴을 보고 있던 프랑스군은 정신을 차린 영국군의 반격으로 또 처발렸고 '''이탈리아 기병들은 약탈품만 챙긴 채 단 한 사람의 전사자도 내지 않고 유유히 후퇴했다'''. 한마디로 프랑스군은 다 이긴 전투인데 지고 만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영국, 프랑스 양군에 대한 이탈리아제 갑옷의 판매가 급증했다. ~~역시 패션은 이태리제~~[* 이탈리아 갑주는 방어력에서 최고를 자랑해 유럽에서 인기가 좋았다.] * 몸값을 받을 수 있는 적은 절대 죽이지 않는다.[* 다만 이건 비단 이탈리아만 해당하는 소리는 아니다. [[백년전쟁]] 당시도 영국군은 프랑스 기사들을 가능하면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몸값을 짭짤하게 챙긴 경우가 허다했으며, 애초에 백년전쟁 훨씬 이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이었다. 사실 더 확장해보면 유럽, 이슬람 등은 [[귀족]] 출신들은 포로로 잡은 이상 죽이지 않고 몸값을 받고 풀어주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 군주론을 통해 군주는 용병을 고용하기보다는 시민군을 꼭 창설하라고 쓸 정도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말한 이탈리아 용병들에 대한 폄하는 과장된 면이 있다. 마키아벨리의 용병에 대한 폄하는 고대 로마의 시민군의 이상에 심취한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측면이 강했으며 이탈리아의 실제 역사는 오히려 시민군이 용병에 밀려 도태되는 과정을 밟았다.[* 사실 고대 로마도 용병을 고용했다. 특히 기병 부족에 시달리던 로마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용병을 고용하여 부족한 기병을 충원했다.] 또한 정말로 전투를 피하고 설렁설렁 싸우는 집단이었다면 제대로 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었겠지만 실제로는 이 시기 이후 16세기를 넘어 17세기에 이르기까지도 이탈리아의 병사와 장군, 무기는 유럽 전역에 인기 있는 수출품이었다. 심지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에서도 많은 수의 이탈리아인 병사가 포함되어 있었고 [[러시아 원정]]에도 많은 수가 참가하여 [[러시아]]의 벌판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다만 이탈리아인뿐만 아니라 스위스인, 폴란드인, 오스트리아인들도 원정에 참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