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군 (문단 편집) === 근세 === 이탈리아군의 전쟁에 대한 관념이 송두리째 무너지기 시작한 계기는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전쟁#s-1|이탈리아 침공]]이었다. 가급적이면 적을 포로로 잡는 문화를 가지고 있던 이탈리아 군인들은 눈앞의 적을 모조리 죽여 없애는 프랑스군의 행동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전투가 벌어진 후 이탈리아 측 지휘관들은 "당연히" 포로를 돌려받으려고 몸값을 가지고 프랑스군 진영을 찾았는데 포로가 되었을 줄 알았던 이탈리아 기사들이 전부 학살당했다는 것을 알고 어이를 상실했을 정도. 이탈리아 용병들의 사고방식은 다른 면에서도 유럽과 차이점을 보이는데 1527년의 [[로마 약탈]](사코 디 로마) 때도 이탈리아인 용병들은 집을 약탈하고 [[여자]]를 [[강간]]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독일]]인 용병들은 약탈과 강간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를 꼭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고 갔다고 한다. 이 문제는 루터파 개신교 신도였던 독일인 용병들의 교황과 가톨릭에 대한 종교적 적대감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16세기 중반 이후 이탈리아 용병들은 이탈리아 내부에서의 전쟁이 강대국들 사이의 세력균형으로 대부분 사그라들면서 이젠 외부로 수출되게 된다. 이 시기에도 이탈리아군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덕분에 이탈리아군 역시 수출 시장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군사적 역량은 갈수록 낮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여기에는 두가지 원인이 있다. 첫 번째는 프랑스나 스페인 등의 통일국가들이 전쟁의 주체가 되면서 점차 전쟁의 규모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는 것이다. 이 차이는 병력에서 여실하게 드러나게 된다. 프랑스, 스페인 등이 전장에 수만명을 일시에 동원할때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비용 문제 때문에 많아야 수천, 보통은 수백명의 용병을 고용하는데 그쳤다. 이러니 프랑스와 스페인이 수만의 대군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탈리아가 공포에 질릴 수밖에... 두 번째는 당시의 운반 능력의 문제로 대부분의 대포는 광산 근처에서 제조되었는데 이탈리아는 적절한 광산이 없어서 포병 기술 및 전력 면에서 뒤떨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두가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위에 언급된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전쟁#s-1|이탈리아 침공]]이다. 수만 대군을 몰고온 프랑스군에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패닉에 빠졌고, 성벽을 한번에 박살내는 프랑스군의 [[대포]]에 이탈리아 인들은 또 한번 충격에 빠졌다. 샤를 8세는 유유자적 남진해서 손쉽게 나폴리를 점령해버렸다. 물론 이런 문제는 어디까지나 육군에 해당되는 것으로 오랜 시간 지중해의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은 달랐다. 베네치아 해군은 혈혈단신으로 [[오스만 제국]]이란 수십배 덩치의 강대국의 물량러쉬를 뛰어난 조선 기술, 기나긴 항해 전통에 따른 숙련된 선원, 경제력, 외교력, 군사력이란 나라의 자산은 총동원해서 피말리는 싸움을 하면서 결국 '''지중해 전체의 오스만 제국 호수화'''를 막아 내었다. 갤리선 중심의 근세의 지중해 해전이 별로 인기 많은 주제가 아니라서 그렇지, 대오스만 전선에서 해상에서 베네치아가 보여준 감투 정신과 조직력, 군사적 인프라는 적어도 그 해당분야에서는 따라올 만한 동시대 유럽 열강이 없었다고 극찬해 줄만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