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태원동 (문단 편집) == 역사 == ||<^|1>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wiki style="margin-top:-5px;margin-bottom:-11px" || 475 || [[고구려]] || 북한산군(北漢山郡) || || 553 ||<|6> [[신라]] || 신주(新州) || || 557 || 북한산주(北漢山州) || || 568 || 남천주(南川州) || || 604 || 한산정(漢山停) || || 660 || 한산주(漢山州) || || 757 || 한주 한양군(漢州 漢陽郡) ||}}}}}}}}} || ||<^|1>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고려시대 {{{#!wiki style="margin-top:-5px;margin-bottom:-11px" || 995 || [[관내도]] [[양주시/역사|양주목]](關內道 楊州牧) || || 1018 || [[양광도]] 양주목(楊廣道 楊州牧) || || 1067 || [[남경]](南京) || || ? || 양광도 양주목 || || 1104 || 남경(南京) || || 1308 || 한양부(漢陽府) ||}}}}}}}}} || ||<^|1>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조선시대 {{{#!wiki style="margin-top:-5px;margin-bottom:-11px" || 1395 ||<-3> 경기좌도 [[양주시/역사|양주군]](京畿左道 楊州郡) || || 1397 ||<-3> 경기좌도 양주부(京畿左道 楊州府) || || 1413 ||<-3> 경기도 양주부(京畿道 楊州府) || || 1424 ||<-3> [[한성부]] 남부(漢城府 南部) || || 1751 ||<-3> 한성부 남부 둔지방 이태원계 이태원리[br](漢城府 南部 屯芝坊 梨泰院契 梨泰院里) ||}}}}}}}}} || ||<^|1>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folding 개화기 ~ 현대 {{{#!wiki style="margin-top:-5px;margin-bottom:-11px" ||<-4> 법정동은 파란색, 행정동은 분홍색 || || 1894 ||<-3> 한성부 남서 둔지방 이태원계 이태원리[br](漢城府 南署 屯芝坊 梨泰院契 梨泰院里) || || 1910. 10. 1. ||<-3> 경기도 경성부 남서 둔지방 이태원계 이태원리[br](京畿道 京城府 南署 屯芝坊 梨泰院契 梨泰院里) || || 1911. 4. 1. ||<-3> 경기도 경성부 한지면 이태원리[br](京畿道 京城府 漢芝面 梨泰院里) || || 1914. 4. 1. ||<-3>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br](京畿道 高陽郡 漢芝面 梨泰院里) || || 1936. 4. 1. ||<-3> 경기도 경성부 이태원정[br](京畿道 京城府 梨泰院町) || || 1943. 6. 10. ||<-3> 경기도 경성부 용산구 이태원정[br](京畿道 京城府 龍山區 梨泰院町) || || 1946. 10. 9. ||<-3> 서울특별자유시 용산구 이태원동[br](서울特別自由市 龍山區 梨泰院洞) || || 1947. 6. || 이태원남부동[br](梨泰院南部洞) || 이태원중부동[br](梨泰院中部洞) || 이태원북부동[br](梨泰院北部洞) || ||<|2> 1949. 8. 15. ||<-4>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br](서울特別市 龍山區 梨泰院洞) || || 이태원남부동 || 이태원중부동 || 이태원북부동 || || 1955. 4. 18. || 이태원1동[br](梨泰院一洞) ||<-2> 이태원2동[br](梨泰院二洞) ||}}}}}}}}} || [[고려시대]] 초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한남동 일대는 용산구 서부와는 다른 행정구역이었고, [[성동구]]와 역사를 함께했다. 983년([[성종(고려)|성종]] 2년)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때에 [[양주시/역사|양주]](楊州)에 편제되어 있다가, 1067년부터는 양주목이 [[남경(고려)|남경]]으로 승격되었을 때 이에 속했다. 얼마 가지 않아 남경이 다시 양주목으로 격하되었으나, 1104년([[숙종(고려)|숙종]] 9년)에 다시 남경이 설치될 때에 그에 속해 쭉 유지되었다. [[1395년]]([[태조(조선)|조선]] 4년)에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에 [[한양도성]] 내부만 [[한성부]]가 되고 그 외 지역은 모두 양주군에 속하게 했는데, 지금의 한남동 지역도 양주군에 속하게 되었다. [[1424년]]([[세종(조선)|세종]] 6년), 한양에서 떨어져 나온 지 29년이 지나서 다시 [[한성부]] [[성저오리]](城底五里)에 편입되어 남부에 예속되었다. 1721년([[영조]] 27년)에 행정구역의 변동이 있을 때에 남부에 둔지방(屯芝坊)이 신설되었고, 이태원리는 한성부 남부 둔지방 이태원계(梨泰院契)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의 이태원계는 지금의 [[후암동]]과 [[한강로1가]], [[한강로2가]]를 아우르는 방대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에 있었던 이태원(梨泰院)이라는 옛 [[원(숙박시설)|역원]](驛院)[* 조선시대 사신이나 관리의 마필을 공급하고 일반 길손이 머물던 공영숙소다.]의 명칭에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대개 역원은 교통의 요지에 설치되는데[* 공교롭게도 과거의 교통 요지였던 곳은 지금도 교통 요지 역할을 하고 있다. 후술할 [[조치원읍]]과 [[사리원시]]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자연스럽게 유동 인구가 많이 오가다 보니 역원 주위에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 이름도 원의 이름을 따라 부르는 일이 관례처럼 되어왔다. 국내에 끝 글자가 '원(院)'으로 끝나는 세 글자 지명(○○원)은 대부분 옛 역원이 있던 마을인데, [[장호원읍|장호'''원''']]([[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일대), [[조치원읍|조치'''원''']]([[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일대), [[인덕원역|인덕'''원''']]([[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관양2동]] 일대), [[사리원시|사리'''원''']]([[황해북도]] [[사리원시]] 일대), [[퇴계원읍|퇴계'''원''']]([[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일대) 등이 이태원과 비슷한 작명 원리로 지어진 지명들이다. 용산구청에서 이태원을 소개할 때는 이 설을 따르고 있다. 옛 기록에는 이태원(梨泰院) 외에도 한자가 다른 이태원(李泰院), 이태원(異胎院) 등의 다른 이름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있었다는 이태원의 터는 지금 이태원동에 있지 않고 [[용산동2가]] [[용산고등학교]] 터에 있었다. 지금의 이태원동과는 해방촌을 사이에 두고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다. [[한양도성]]에서 [[숭례문]]으로 나와 남단고개(지금의 [[해방촌]])를 넘기 전에 이곳에서 묵거나 말을 갈아타고 남단고개를 넘고 녹사평을 지나 동작나루나 한강진으로 통했다. 또 다른 설로는 당시 이타인(異他人)이라고 불리던 일본인 전용 거주지가 조성되었던 곳으로, 그 이름에서 마을의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날 역원이었던 이태원의 터는 [[용산고등학교]] 정문 앞에 있으며, 배나무가 많아서 이태원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914년]]에 [[경성부]]를 축소하면서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漢芝面)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경성대확장 때에 다시 경성부에 편입되어 이태원정(梨泰院町)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태원 일대는 공동묘지가 들어선 곳이었는데, 현재의 [[한남동]], [[서빙고동]] 등과 함께 새로운 택지지구로 계획되어 개발되면서 공동묘지가 모두 헐리고, [[1938년]]에는 삼각지에서 [[장충동]]으로 가는 남산주회도로(현재의 [[이태원로]])가 뚫리면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1943년]] 구제 실시 때에 [[용산구]]에 편제되었다가, 해방 이후인 [[1947년]] 6월에 서울특별시령 제2호에 의해 동회제도가 실시되며 이태원북부동(梨泰院北部洞)과 이태원중부동(梨泰院中部洞), 이태원남부동(梨泰院南部洞)으로 나뉘었고, [[195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조례 제66호에 의해 이태원북부동과 이태원중부동이 이태원제2동으로, 이태원남부동이 이태원제1동이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옛 일본군 병영이었던 자리에 [[미8군]]이 주둔하면서 [[용산기지]] 인근의 이태원동과 [[한남동]]은 미8군의 배후지가 되었고, [[6.25 전쟁]] 직후부터 이 일대는 서울의 외국인들이 몰려사는 지역으로 발전한다. 6.25 직후에 인근의 해방촌부터 이태원까지 피란민들과 상경민들이 몰리면서 주택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세운 이태원시장은 미군 PX에서 나온 물자로 상업을 이어가며 번영하게 되었고, 용산기지 바로 옆이라는 특수한 지리적 위치가 맞물리면서 외국 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다수의 대사관과 대사관저가 이태원과 한남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1970년대부터는 이태원로 이북으로 조금씩 부촌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울 용산구 일대에 거대한 [[공동묘지]]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375939_35744.html|#1]] [[https://imnews.imbc.com/newszoomin/newsinsight/6375796_29123.html|#2]] [[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376335_35744.html|#3]] [[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375939_35744.html|#]]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도 자택을 다시 짓던[* 원래는 오빠인 [[이재용]]이 [[임세령]]과 결혼 후 이혼하기 전까지 살던 신혼집이었다. 2020년에 여동생인 이서현 이사장에게 247억원에 팔았다고 한다.] 중 쏟아진 유골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고. 사실 신도시, 유원지, 공원 등을 짓다가 무덤이나 시신이 발견되는 일은 종종 일어난다.[* 멀리는 [[삼국시대]] 고분부터 가깝게는 [[6.25 전쟁]] 당시 사망한 사람의 시신까지 발견되곤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