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화룡(야인시대) (문단 편집) === 해방 및 미군정 시기 === 52화부터 등장한다. [[김두한(야인시대)|김두한]]이 우미관의 오야붕으로 전국을 장악했지만 북쪽의 주먹들은 그를 전국의 오야붕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북쪽 주먹들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이천패 오야붕인 장도리가 자존심 없는 주먹은 없지만 북쪽은 그 정도가 지나치게 심하다고 했을 정도로, 전국 주먹소집에 북쪽 주먹들은 아무도 안 온 것에 대해서도 그게 이유라고 봐야 한다고 했었을 정도였다.][* 다만 자존심과는 달리 김두한의 경력이 더 문제였을 수도 있는데, 당장 비슷한 위치의 구마적의 경우 전국 주먹들에게 소집명령을 걸면 남이든 북이든 바로 우미관으로 집합했던 것을 생각하면 북쪽의 주먹들은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어린애가 구마적을 이기고 우미관을 차지한 것도 못 믿겠는데 실력이야 이남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들으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는 있었겠지만 우미관에 등극하고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전국의 오야붕이라고 본인들을 소집하자 더더욱 반발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 세력이 가장 컸다.[* 1부에서 장도리의 언급으로 이화룡이 북쪽에선 가장 큰 세력이라고 언급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평양시|평양]]을 근거지로 삼으며 지내오다가 해방 이후에는 [[시라소니(야인시대)|시라소니]]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의 등쌀에 못 이겨 경성으로 내려온 주먹패 중 하나였다. 이전부터 신사적이기로 소문난 주먹이었다고 하며, 실제로 명동에 쳐들어올때도 함부로 남의 구역을 넘보는 것을 김무옥이 지적하자 "사정이 급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기도 했다. 또한 시라소니 린치사건이 벌어진 직후 사죄+해명[* 린치 사건이 이정재랑은 무관하며 이정재 아래의 간부들과 시라소니간의 일이었다는 것. 다만 이는 작중 설정일 뿐 실제로는 이정재의 직접 지시에 의해 발생했다.]을 하러 맞아죽을 각오로 명동에 찾아온 동대문 소속 김기홍과 이억일에게 병신이 돼서 돌아갈 수도 있다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긴 했으나[* 그 전에도 "가만두지 않갔어. 동대문, 박살을 내고야 말갔어! 박살을!!"이라며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름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은 같다. 이때 해명을 하러온 [[김기홍(야인시대)|두]][[이억일|사람]]을 제대로 조져놨어도 이상할 것이 없던 상황이었다. 어차피 전쟁을 각오한 마당이지만 이들을 곱게 보낸 것은 이화룡의 신사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 김기홍의 사죄와 해명을 들은 후 이정재한테 뒷통수 조심하라는 말을 전해주라고 하며 그 들을 사지 멀쩡하게 돌려보내기도 했다. 시라소니 린치사건 직후 동대문 사단이 그저 시라소니를 찾으러 온 것일 뿐인 [[맨발의 대장(야인시대)|맨발의 대장]]을 집단 구타해 부상을 입힌 것과 대조적이다. [[명동]]에서 [[김무옥(야인시대)|김무옥]], [[김두한(야인시대)|김두한]]과 차례대로 결투를 벌인다. 김무옥 상대로는 시종일관 우위를 점하다 김무옥의 메치기를 한 번 당하지만 곧바로 일어나 유효타를 먹이는 등 우세한 싸움을 벌였다. 곧이어 김두한을 상대로는 초반에 발차기 몇 번을 날렸지만 김두한은 모조리 막아냈고, 곧이어 김두한의 발길질 한 번에 유효타를 먹었다. 이후 김두한의 계속되는 돌려차기에 접근하지 못하다 겨우 접근하지만 곧 김두한의 발차기에 등을 맞고서는 "역시 세상은 넓구만 기래"라며 실력을 인정한다. 승산이 없음에도 끝장은 봐야하지 않겠냐며 싸움을 이어가는데 김두한 덕에 목숨을 건진 인연이 있는 [[황병관(야인시대)|황병관]]이 김두한을 알아보고 이들을 중재 싸움은 끝나고 김두한과 이화룡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김두한은 이화룡의 식구들이 머물 수 있게 명동을 떼주어 명동파를 결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후 뒤이어 월남한 [[정팔(야인시대)|정팔]]네 패거리들과 명동거주 문제로 충돌해 협상을 하게 되는데[* 정팔이 노른자격인 [[중앙시네마|중앙극장]]을 달라했고 이화룡은 이를 거절했다.] 분위기가 거칠어져 두 조직이 당장이라도 맞붙을 위험한 상황이 오게 된다. 정팔 쪽에서도 자기편에는 시라소니가 있다며 이화룡과의 전쟁을 피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떠나고 이화룡도 다소 놀란 듯 "믿는 구석이 있었구만"하고 엎었던 협상 테이블에 도로 앉는다.[* 실제 이화룡과 시라소니는 북쪽에서부터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정팔과 시라소니 모두 신의주 출신이었다.] 이렇듯 두 조직간의 분위기가 매우 험악했지만 정작 시라소니는 그 둘에게 북쪽사람끼리 서로 같이 지내라고 중재를 하면서 '''"같은 이북 출신끼리 싸우지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라면서 오히려 화해를 성사시키는 바람에, 이화룡파와 정팔파 두 집단은 불편한 동거에 들어가게 되었고 평화적으로 협상을 통해 한 식구가 된다. 두 사람은 처음에는 어색해하면서 서로 불편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부터 한 조직 식구들이었던 것처럼 잘 지내게 된다. 그리고 이화룡이 1인자, 정팔은 사실상 2인자가 되면서 명동파라는 대조직의 토대가 갖추어지게 된다. 시라소니의 중재도 있었지만 공산당 및 좌익 세력이라는 공동의 적과 맞서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갈등이 해소되었던 것이다. 특히 정팔의 경우 기싸움을 하던 시점부터 이화룡이에 형님 대접을 해준 것도 있지만, 동시에 이화룡이 일제치하 때부터 명동을 관리하던 하야시의 사무실을 정식으로 김두한에게서 인도 받은 시점인지라 정팔이 중앙극장을 얻던 다른 곳을 얻던 상관없이 이화룡에게 상납금을 줘야하는 입장이니만큼 더 이상 버텨봐야 득될 것도 없으며 선배인 시라소니의 체면을 구기는 짓이기도 하고 또 선배에 대한 예의도 스스로 없애는 꼴이었으니 딱히 선택지도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물론, 상대가 검은 신사라고 불리는 이화룡이니 정팔이 나름대로 자존심도 지켜가며 버틴 것으로 보인다.[* 만약 다른 주먹들이었다면 당연히 항쟁 및 전쟁이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경우 바로 우미관이 투입되었을 수도 있는데 당장 이화룡이니까 그냥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 당시 명동으로 집결하던 이북 출신의 주먹들 중에서 김무옥과 문영철을 상대로 제대로 버틸 수 있는 인물이 이화룡을 제외하고는 정팔 단 한명이었던지라 우미관패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들을 전부 휘하에 집어 넣어버릴 수도 있었다. 당장 우미관을 당시 한반도 주먹들의 총 본가였던 만큼 그렇게 했다고 해서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야인시대에서는 이화룡이 아주 약간이던 혹은 한 수 위던 간에 김무옥보다도 강한 것으로 나오기는 하지만 실제 김무옥은 김두한에 버금가는 싸움꾼으로서 이화룡보다도 더 강했다고 한다. 이 점에서 우미관이 얼마나 무서운 조직인지를 잘 알 수 있는데 다른 조직도 아니고 우미관에는 오야붕이자 주먹 세계의 황제인 김두한에 버금가는 주먹들로만 추려봐도 김두한의 최측근인 김무옥과 문영철 그리고 김두한의 신임을 받았으며 소꿉친구라던 망치에 본래는 하야시패의 최고 간부 중에 하나였으나 훗날 하야시패를 빠져나와서 김두한의 우미관에 가담하는 김두한의 라이벌이라는 소리까지 듣던 김동회까지 존재하며 이들은 하나같이 이화룡보다도 강하다는 말이 나오는 인물들인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그 후로 좌익들을 몰아내기 위해 명동파 식구들을 소집해 [[서북청년회]] 결성식에 참여하려 하는데[* 다만 정치는 싫어했는지 "권력과 주먹은 가까이 할수록 비극이 일어난다. 그리고 결국 주먹들이 권력을 위해 일해야 하며, 대부분이 결말이 나쁘다."고 말했다.], [[정진영(야인시대)|정진영]]이 이걸 막으려고 [[김천호]]를 포함한 [[조선청년전위대]]의 정예 부대를 투입해 본의 아니게 [[심영(야인시대)|심영]]이 [[내가 고자라니|고자가 되는 데]] 한몫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정진영(야인시대)|정진영]]은 서북청년회를 반드시 저지해야겠다고 생각해 심영의 호위부대마저 빼내오면서까지 무술 유단자로 이루어진 정예 부대를 몽둥이로 무장해 파견했지만, 명동파에 가보니 술주정을 부리고 있는 시라소니뿐이었고, 이마저도 시라소니에게 죄다 개털렸다. 그리고 자기를 지킬 호위부대가 없어진 심영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물론 고위 오야붕급과 졸개급의 차이 및, 명동파의 전투력을 생각하면, 전위대 졸개 나부랭이들이 서북청년회 결성식에 갔더라도 막을 수 있을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 후 여전히 서북청년회 소속으로 활동하며 [[4.3 사건]]이 터져 서북청년회 소속으로 제주도에 갔다온다. 그리고 거기서 4.3 사건으로 인해 서북청년회에게 학살당한 제주도 도민들을 조직원들과 보면서 안타까운 듯 한탄을 했으며 서북청년회 소속인 그가 봐도 아니라고 생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