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화장 (문단 편집) === 조선시대 === 이 건물이 자리잡은 이화동 일대는 원래 [[배(과일)|배]]밭이었고, [[진성대군|중종]] 이전부터 이화정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화정동(梨花亭洞)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일제강점기]] 때 없어졌다. 이곳은 일찍이 중종 때의 문신인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 1484∼1555)[* 신숙주의 손자기도 하다.]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로 불렸으며, 경치가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던 곳이었다. 중종 때 문장·글씨·그림을 잘하여 당대의 삼절(三絶)이라는 칭송을 받은 신잠(申潛, 1491∼1554)이 <이화정에서 술에 취하여>라는 시를 읊으며 젊은 날을 회고하였는데, 거기에 "뜰 앞엔 배꽃만이 피었을 뿐, 노래하고 춤추던 그때 사람들 볼 수 없구나(庭前只有李花樹 不見當時歌舞人)"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근에는 [[봉림대군|효종]]의 잠저인 [[어의궁|용흥궁]](龍興宮)이 있었으며, 또 [[인조]]의 3남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 제택조(第宅調)에 "인평대군의 집은 건덕방 낙산 아래에 용흥궁과 동서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데, 석양루가 있다. 기와·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 장생전 건물의 일부는 이승만이 이곳에서 내각을 구성할 당시에도 이화장 정문 앞에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조선)|정조]] 때 서화가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2∼1791)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4.19 혁명]] 이후 계곡이메워지고 집이 들어서면서 땅에 묻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