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회영 (문단 편집) == 가족과 후손 == [[파일:FB_IMG_1474743381308.jpg]] 앞줄 오른편 말년의 이회영. 본래 이회영 일가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후손으로 부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5425|이유승]]이 [[이조판서]], [[우찬성]], 중추원일등의관, 궁내부특진관 등을 지냈을 정도였기에 [[한일병합]]을 지지하거나 묵인할 경우 일제에게서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었다. 이 부분을 잘라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실로 엄청난 [[대인]] 집안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서구권에는 [[칼레]]의 여섯 [[시민]]이 있다면 한국에는 '이회영과 그의 여섯 형제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제인 둘째 [[이석영]]은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유원은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당대 최고 갑부였던 사람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마석) 모란공원묘원을 지나 [[서울양양고속도로]] 인근에 있는 집이었다고 한다. '[[흥인지문|동대문]]부터 80리'라고 했는데 서울 나들이를 갈 때 '동대문에 당도해서야 남의 땅을 밞았다'고 했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중랑구]] 및 경기도 [[구리시]], 남양주시 정도가 그의 땅이었을 것이다. 이석영 은 1934년 74세의 나이로 굶어 죽었다.[* 이 가문의 재산이 짐작이 안 된다면 이 분들보다 돈이 훨씬 적었던 [[민영휘]]의 [[친일]] 행각의 결과를 살펴보면 된다. 현재 친일한 민영휘의 재산이 아직도 대한민국에 많이 남아 있다.] 그와 그의 6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중 5명이 옥사하거나 아사하였다. 이회영은 만주에서 항일에 대한 계획을 세운 뒤 다롄으로 이동하려다가 상하이 밀정에게 걸려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형인 이건영과 이철영은 병으로 사망했고 이시영을 제외한 다른 동생 1명은 소식이 끊겼다가 일가족과 함께 [[일본군]]에게 몰살당했다는 비고가 전해졌다. 만주로 떠난 뒤 소식이 행방불명되고 이후 [[신문]] 기사를 통해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신문 기사 내용이 "만주에 도착해 배에서 내리다가 군경에 검문을 받고 수감된 뒤에 창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한 이상한 [[노인]]" 이후 자결을 했다는 내용은 [[조작]]이었고 사실은 배에서 내릴 때 체포가 돼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만주의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셨다.] 바로 아래 동생이자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대한민국 부통령|부통령]]이 되는 성재 [[이시영(정치인)|이시영]]만이 유일하게 살아서 조국의 [[광복]]을 보고 귀국했다. 여동생인 경주 이씨는 해공 [[신익희]]의 형인 독립운동가 신재희에게 시집갔으며 이회영의 조카들도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달성 서씨와 1885년에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달성 서씨가 죽은 후 1908년에 한산 이씨 이은숙과 [[재혼]]하여 2남 3녀를 낳았다. 이은숙은 이회영이 사망했을 때 영전에 조사를 써서 올렸는데 내용이 절절하여 종종 회자되고는 하는 명문이며 광복 후 '서간도시종기'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 수기를 쓰기도 했다. 달성 서씨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이규학 역시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협력하며 독립운동을 했는데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피난시키는 일을 맡았고 이후로도 [[충칭]]과 [[상하이]]를 오가며 연락 업무를 맡았다. 사후인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부인인 조계진은 [[흥선대원군]]의 외손녀로 직접적인 의열 활동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비밀 연락 요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넷째 아들이 전 [[국회의원]]이자 [[김대중]] 정부 때 초대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1936)|이종찬]]이다. 이회영의 자녀들 중 이은숙과의 사이에서 난 3남 이규창[* 초명은 이규호였다.] 역시 흑색공포단에 가담하여 아나키즘 성향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상술한 대로 아버지를 일제에 밀고한 밀정인 사촌을 처단했으며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제에 제공하거나 독립운동을 방해하던 밀정들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고 국내에 잠입해 밀정 이용로를 처단했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된 뒤 13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 안에서도 일제를 규탄하는 유인물을 몰래 만들어 배포하다가 발각되어 4년간 독방에 수감되어 있다가 광복을 맞이해 석방되게 되며 공로로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이외에 차녀 이규숙의 남편인 장해평(莊海平)[* 이칭으로 기준(麒俊), 남용무(南容武), 이계백(李啓白) 등이 있다.]도 독립운동가였으며 이규창의 장인인 정이형은 정의부 [[사령관]]을 지내기도 했다. 4남이자 막내 아들은 이규동[* 초명은 이규석이었다. 이회영이 사망했을 당시 6세였다. 1926년 2월 2일 생으로 2014년 3월 12일 작고.]으로 그의 장남이 [[변호사]] 겸 5선 [[국회의원]]인 [[이종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