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후락 (문단 편집) === 광복 이후 === [[광복]] 이후 귀국해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3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하지만 [[위키백과]]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대위]] 임관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당시 [[미군]]이 일본군에서의 [[계급]]을 고려해서 계급을 부여했기 때문에 생긴 일. "이후락이는 말이오. [[대한민국 국군|국군]] 창건 당시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 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던 것이겠지." 라고 하는 [[김정렬(1917)|김정렬]]의 증언도 참조][* 반면 [[두산백과]]에서는 소위 임관이라고 되어 있다. 군사영어학교에서 공식적으로 대위 임관자는 군번 1번 이형근, 2번 채병덕, 3번 유재흥, 4번 장석륜, 5번 정일권 등 단 5명 뿐이다. 이중에서 채병덕은 일본군 소좌, 이형근, 유재흥, 정일권은 일본군 대위, 장석륜은 중위 출신이나 대한제국시절 유학갔던 일본육사 대선배이다. 참고로 일본군내 조선인 장교들은 오직 일본 육사출신 밖에 없다.(학병 출신들의 경우 간부후보생 교육중 일제가 패망하여 가라로 소위 계급장 달아 준 후 군 해산함.) 그렇기 때문에 몽땅 일본 육사 선후배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후락이 구라를 치는지 아닌지 모를 수가 없다.] 1949년 [[남조선로동당]] 사건으로 파면당한 박정희의 후임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가 사망했다.][* 박정희는 이 때 이후락의 밑에서 [[문관]]으로 있었고 훗날 자신의 조카사위가 되는 [[김종필]]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한번은 1950년 초에 박정희와 김종필이 다옥동에서 술을 마시다가 통금 시간을 넘기게 되어 마침 다옥여관에서 지내고 있던 이후락의 지프를 빌리기 위해 그를 만나려 했지만 이후락은 얼굴도 내밀지 않고 딸로 추정되는 어린 여자아이에게 잔다고 하라고 몹시 짜증냈다고 한다. 1951년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진급해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1952년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진급,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수료, 1957년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에서 만들어진 [[중앙정보위원회|79부대]]라는 정보 기관의 수장이 되어[* 당시 이후락 실장의 [[군번]]이 79번이여서 이름을 '79부대' 혹은 '79호실'이라고 불렸다.] [[라오스 왕국|라오스]]에 잠입하여 밀파 활동을 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961년에는 소장 계급으로 예편하여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장면 내각]]에서 신설한 정보 기관인 국무총리실 산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